한국일보

마지막 이사

2014-11-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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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생각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또한 떠남의 계절이다. 힘써 맺은 열매가 땅에 떨어지고, 마지막 화려한 빛깔의 옷을 벗으면 나무는 벌거벗은 나목이 된다.

떠남의 계절에는 누구나 인생의 세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더욱 깊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누구이며, 왜 여기 존재하는가?”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나이가 더 할수록 질문의 무게가 더 해 간다.

오래 전 큰아들이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였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느닷없이 “나는 엄마 배에서 나오기 전에 어디 있었냐?”라는 제법 철학적 질문을 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다. 말하자면 ”어디서 엄마한테로 이사 왔느냐” 하는 질문이다. 과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25년 이상 살던 정든 집을 정리하고 자그마한 콘도로 이사를 했다. 소위 노년의 다운사이즈(downsize)를 한 것이다.


아내는 병이 날 정도로 많은 수고를 했다. 한 지인은 이사 하는 것이 배우자를 잃은 것 다음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것이라고 좀 과장해서 말했는데, 과연 이번 이사는 참 여러모로 힘들었다.

오랜 세월 우리의 체취와 기억이 새겨진 것들을 내 버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콘도의 공간이 좁고, 많은 살림살이들은 거의 쓰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버리는 것이 잘 안되었다.

한 대학동창은 오랜 교수 생활로 쌓인 수많은 서적과 자료가 결국은 남의 손에 의해 쓰레기로 버려지는 것이 싫어서 눈물을 머금고 자기 손으로 버렸다고 말했다. 결국은 모든 것을 놓고 떠나야 하는 존재임을 잘 알면서도 인간의 집착, 욕심은 참으로 끈질기다.

이사 갈 새 콘도에 예정보다 늦게 입주하게 되고, 살던 집은 팔려 한 달 동안 개인집의 지하실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조리 시설이 없기 때문에 아내가 고생을 하였지만, 평생을 지하 단칸방보다 훨씬 열악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알기에, 머물 장소가 있는 것에 감사하며 지냈다.

누군가는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을 추려보니 50여 가지밖에 안 되더라고 했는데, 정말 최소한의 살림살이로 한달을 버텨보니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너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 사람들은 일생에 평균 10번 정도 이사한다는데, 우리도 그 정도 한 것 같다. 고국을 떠나 먼 타향에서 사는 우리는 이미 남다른 이사를 한 사람들이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아파트, 타운하우스, 개인집, 콘도 등 모든 형태의 주거지에서 살았다.

이사는 이제 그만, 지금 이사 온 콘도에서 언젠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생각을 하니 이 집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제 이 집에서 천국으로 이사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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