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빛난 인연

2014-10-2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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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봉 / 수필가

페르시아에 이런 민담이 있다. 한 여행자가 어느 날 좋은 향기가 나는 흙을 발견하곤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니 흙에서 어쩜 이리도 좋은 향기가 날 수 있단 말인가?” 놀랍게도 그 흙덩이가 대답했다. “나는 장미꽃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훈훈한 사람향기가 넘쳤던 H형이 갑자기 타계하셨다. 이웃에서 십수년 세월을 가족처럼, 형제처럼 지내던 분이었다. 지난여름 무덥던 날, 가벼운 행장으로 수술대에 올랐는데 뜻밖에 출혈이 멎지 않은 것이었다. 그와 나의 삶이 맞닿은 곳에 늘 웃음과 행복함이 컸기로 갑자기 그를 잃은 충격과 상실감은 견뎌내기 어려웠다.

수술 5분전까지 전화로 나눴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며 요즘 죽음과 인연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늘었다. 어젠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글을 쓰다가 타계한 최인호의 <인연>이란 글을 보았다.

“생에 크고 작은 인연이란 따로 없다. 우리가 얼마나 크고 작게 느끼는가에 모든 인연은 그 무게와 질감, 부피와 색채가 변할 것이다. 운명이 그러하듯 인연의 크고 작음 또한 우리들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닐까? 인연은 빛이 되기도 하고 빛을 가리는 그림자가 되기도 한다.”형의 마음은 크고 따뜻했다. 우연히 만난 나와의 인연을 오랜 세월 피같이 끈끈한 우애로 키워왔다. 나는 그에게 어떤 인연이었을까. 빛이었을까, 혹시 빛을 가리는 그림자였을까.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인연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나는 부모님과 아내, 형제들은 물론, H형 같은 친우들과도 천겁의 선연(善緣)의 축복 속에 살아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는 또 다른 소중한 것들과 인연을 맺고 산다. 내겐 평생 천직이 인연이었고, 좋아하는 글과도 인연이 깊다. 그리고 이젠 은퇴 후를 위해 한의술과도 연을 맺었다. 폴 마이어는 <베풂의 기술>이란 책에서 이렇게 썼다.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는 만들 수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종할 수는 있다.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바람처럼 멈출 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면, 인연이란 내가 만들어가는 풍차 같은 것이 아닐까? 죽음은 조물주의 뜻이지만 풍차는 내가 만들 수 있는 내 몫이다. 나와 관계를 맺은 인연들과 풍차를 돌리듯 순리대로 살다보면, 어느 날 바람처럼 찾아올 죽음마저도 내 삶의 한부분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의 인연들을 성실하게, 또 역동적으로 무게와 질감과 색채를 더해가며 살라는 것이 조물주의 뜻일 것이다. 그런 삶만이 훗날 후회없이 의연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는 복된 삶이라는 메시지로 들린다.

물론 나도 잘 안다. 내 인격과 능력의 한계로 아무리 노력해도 인연들이 다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악연도 많다는 것을. 그래서 이 세상엔 내가 다 가질 수 없고, 다 이룰 수 없고, 다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생살이의 민낯임을 안다.

그런 점에서 현진이란 구도자가 쓴 <삶은 어차피 불편한 것이다>도 공감을 자아낸다. “뿔이 있는 소는 날카로운 이빨이 없고, 날카로운 이빨이 있는 호랑이는 뿔이 없다. 예쁜 꽃은 열매가 변변찮고, 열매가 귀한 것은 꽃이 별로다..” 이래서 세상은 공평하고,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는 것이 세상 인연의 본질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불평만하면 나만 망가질 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인연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가꾸어 가면 결국 모든 것이 합(合)해서 선을 이루심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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