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4-10-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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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그 노래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아주, 아주, 오랜 옛날 월성동쪽 용궁 남쪽 황룡사 구층목탑 그늘에 기대어 서서 그대는 노래를 들려 주겠다 약속하였지만 아직 그 노래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탑도사라지고 절과 사직도 사라져 고즈넉한 가을 절터와 당간지주만 남아 쓸쓸한데 돌 속에 묻혀서도 속절없이 천 년 신라 쪽으로 열려 있는 눈과 귀, 그대 언제쯤 서라벌에서 부는 바람 편에 안부와 주소가 적힌 길고 긴 사랑의 편지 보내주시겠습니까, 그 편지 받으면 비파암 지신 석가께서 낮잠에 드는 봄날 오후, 바위 위에 벗어둔 가사 슬그머니 훔쳐입고 그대 만나러 저잣거리로 내려가겠습니다. 내려가 그리운 그대 노래 한 소절만 들을 수 있다면 다시 돌 속에 잠겨 흘러갈 오랜 잠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노래 허리에 띠로 감고 앉아 또 한 천 년 무작정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일근 (1957- ) ‘노래-경주남산’전문

천 년의 사랑이 있습니다. 저 옛날, 어느 신라 처자의 연인이 있어 수 천 년 바람에 불려가는 무량의 연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서정적인 동시에 대지적인 건강성과 방대한 스케일을 가진 연가입니다. 이 노래가 매혹적인 것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아름다운 허무 때문일 것입니다. 폐허가 된 인연의 바람 속에 무소유의 꽃이 무작정 피어나니 사랑이 순간이었다는 번뇌는 사라진지 오래인가 합니다.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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