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에드가 앨런 포

2014-10-11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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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혜 맥클린, VA

“오늘이 에드가 앨런 포의 탄생 200주년 되는 날입니다. 매년 1월 19일이면 동트기 전 컴컴할 때 그의 무덤에 검은 외투 입은 신사가 와서 반 남은 꼬냑 병과 세 송이의 장미를 놓고 가곤 했습니다. 오늘 새벽에도 어김없이 술과 장미를 놓고 갔지요. 지난 60년간 그리해 왔으나 오늘로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들 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 20세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80세가 되었을 터이니 더 계속 하려도 쉽지 않을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그를 ‘포 건배자’ (Poe Toaster)라고 부릅니다.”
2009년 1월19일 저녁 뉴스 시간이었다. 그 소리에 나는 “어머나, 세상에! 역시 포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르네. 60년간 검정 외투 입고, 술병에....” 하며 혀를 찼었다.
포가 죽은 지 100년 되는 해에 시작해서 그의 탄생 200년까지 그 일을 한 셈이다. 볼티모어의 포 사모회 (Members of the Edgar Allan Poe Society in Baltimore) 역시 이 전통을 지키는데 한몫하고 있다고 들었다. 세 송이의 장미는 포, 곁에 묻힌 포의 아내 버지니아, 포의 장모, 이렇게 세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아내 버지니아는 죽을 때 친정어머니한테 불쌍한 남편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고 장모는 포가 죽기까지 그를 돌보았다고 한다. 사는 게 뭔지 늘 바쁘다는 핑계로 에드가 앨런 포나 십 대 시절 눈물 흘리며 읽었던 아나벨 리는 수십 년간 깡그리 잊고 허둥대며 살았다. 하지만 포를 자기 일처럼 여기며 산 사람들이 많네…. 싶었다.
지난 7일은 그가 간 지 175년이 된 날이었다. 포가 태어난 보스턴에서는 그의 동상을 세우고 제막식을 했다고 한다. 포는 1809년에 보스턴서 태어났다. 그가 1세 때 아버지는 가족 버리고 집을 나갔고 그 다음 해 어머니마저 폐병으로 죽었다. 고아가 된 포는 버지니아의 리치먼드에 사는 존 앨런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입양아처럼 자랐다. 앨런의 첫 부인이 죽고 둘째 부인이 들어오자 포와는 관계는 멀어져 버렸고 그때부터 그는 힘들게 살았다.
26세에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13살짜리 사촌 동생 (고모인 마리아 포 클렘의 딸)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한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5년간 폐병을 앓다가 25세의 어린 나이에 죽는다. 버지니아가 죽은 후 포는 술에 절은 폐인으로 겨우 2년을 더 살다 거리에 쓰러져 죽었다. 당시 40세. 아나벨 리는 그가 죽기 다섯 달 전에 쓴 시다.
1800년대 초기 미국의 인구는 겨우 5백만이었다.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의 대명사라 해도 틀림없던 당시 미국의 문학적 풍토는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꿈꾸는 낭만주의 작가로 살기에는 때를 잘못 타고난 셈이다. 그 때문에 천재적인 작가이고 뛰어난 문학평론가였지만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해 평생을 힘들고 외롭게 살았다. 게다가 그의 독특하고 괴팍한 성격 (어쩌면 이는 그의 천재성, 특히 우주와 천체를 이해하고자 했던 그의 과학적 사고에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은 그를 더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인간의 공포심리를 자극하는 공포소설, 인간 심리를 추적하는 추리소설 등, 과학소설이 실은 그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포는 그의 글이 교훈이나 도덕의 대용으로 쓰이는 것을 거부했다. 따라서 실용주의 세상인 미국에서보다 프랑스에서 더 먼저 인정받고 환영받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른 오늘에야 그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는 작가의 위치에 서게 되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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