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가정과 사회에 대화가 부족해 걱정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가족 사이의 대화는 물론, 사회 속에서 대화의 메마름은 더욱 심각한 듯하다.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던 대화가 자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전에는 비록 초면일지라도 이내 두런두런 구수한 대화를 나누던 어른들을 볼 수 있었고, 간혹 무리지어 웃고 떠들던 청소년들의 발랄한 대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요즘은 그런 모습 보기가 어렵다.
고국을 보면 정치계를 보아도 대화가 빈약 하고, 시민단체를 보아도 진보와 보수 사이에 대화가 사라졌다.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말, 막말만이 오고 갈 뿐이다. 자녀를 잃고 슬퍼하며 단식하는 사람들 앞에 위로와 격려 대신, 폭식 투쟁이라며 음식을 먹고 마시는, 차마 해서는 안 될 행동이 서슴없이 나온다. 대화의 부족, 대화의 실종이다.
대화는 단순하지 않다. 대화는 말로 하지만 단지 소리의 전달이 아니라 의사 곧 마음과 생각의 나눔이다. 대화가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개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 사람의 성품이나 그 사람의 관심사를 나타낸다고 한다. 마음속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온다는 성경의 말씀 역시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대화에 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태도야말로 좋은 대화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말을 중시하였으며,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사람이 지녀야 할 미덕으로 여겼다. 말과 말하는 사람을 하나로 본 것이다. 말이 곧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의 인격이 곧 그의 말이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공손하고 정중하게 했으며, 말을 들을 때에도 깊이 가려서 들었다.
지키지 못할 말은 허언(虛言)이나 식언(食言)이라 하여 멀리했으며, 잘못한 말은 실언(失言)이라 하여 곧바로 사과하였고, 직언(直言)이나 충언(忠言)이나 고언(苦言)은 높이 샀으며, 극언(極言) 폭언(暴言) 망언(妄言) 참언(讖言) 교언(巧言) 감언(甘言) 등은 옳지 않게 여겼다.
좋은 대화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는 또 대화의 내용이다.
누군가 지어낸 우스개 이야기겠지만 어떤 부부는 대화라고는 “밥 먹었나?”, “애들은?”, “이제 잡시다” 달랑 세 마디 밖에 안 한다고 한다. 이런 식의 내용 없는 대화로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이나 알아감의 즐거움 나아가 존재와 존재의 만남에서 오는 깊은 내적 희열을 맛볼 수 없으며, 또 오래가지 못한다.
각종 정보와 크고 작은 뉴스로 넘치는 오늘날 우리 대화의 내용은 어떤가? 자칫하면 방대한 정보량에 치여 아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시간을 상실할 수도 있고, 지구촌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사고나 스포츠 혹은 연예를 비롯 각종 뉴스를 대화의 내용으로 삼기에 바빠 일상 속에 있는 빛나는 담담한 행복이나 시대를 초월한 심원한 내용의 대화를 놓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대화의 내용을 생각하면 단연 <플라톤의 대화>가 생각난다. 2,500여 년 전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동시대인들과 나눈 대화는 국가의 의미, 영혼 불멸,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 등등 삶의 의미와 사회 공동체의 발전에 대한 깊고 진지한 내용이었다.
몇 백 년 뒤에 후대인들이 오늘 우리의 대화 내용을 들여다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수 천 년이 지났어도 후대인들과 아직도 ‘대화’할 수 있는 플라톤처럼, 이 시대 우리의 대화가 따듯하고 인간적이며 동시에 영원한 진리와 사랑을 담은 시대를 초월한 대화, 미래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시대를 이어주는 대화’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