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콩팥의 ‘이민 생활’

2014-09-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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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식 / 내과의사

신장이식을 받고 이전 보다 더 활기차게 소신껏 살아가는 분을 만날 때면 그 투병생활 앞에 겸손한 마음이 된다. 한편 이식되어 와서 새 주인 밑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신장을 생각하면 기특하기만 하다. 이식된 신장은 우리 이민자들 같다는 생각에 나는 잠시 콩팥이 되어본다.

강낭콩을 꼭 닮은 나는 재주가 뛰어나거나 뇌처럼 지능을 지니지는 못했으나 보통의 재주와 남다른 성실성이 자산이다. 몸집은 작아서 어른의 주먹 크기이며 몸무게는 250g 밖에 나가지 않는다. 주인의 허리 뒤쪽에 숨어있는 나의 임무는 1분당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5리터 혈액의 25%를 쉴새없이 깨끗하게 해주는 것이다. 불필요한 찌꺼기는 방출하고 몸에 필요한 영양분과 전해물질은 다시 흡수하여 주인 몸의 평형을 유지해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나의 노고를 알아주기는커녕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피를 걸러주는 일 외에 적혈구를 만들도록 골수를 자극하는 에포겐이란 호르몬을 분비하며, 칼슘과 인의 평형을 잡아주며, 비타민 D의 활성화를 돕는다.


안정되게 살던 나의 삶은 주인이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꼬이게 되었다. 주인이 뇌사 상태에 빠지자 그 가족들은 아직 쓸 만한 나를 젊은 사람에게 옮겨주기로 했다. 정든 곳을 떠나면서 반대쪽 콩팥에 속한 형제, 자매들과 생이별을 하였다. 그래도 다행히 내 속에는 실핏줄로 뭉쳐진 100만개의 사구체, 이민 동반자들이 있었다. 100만이 동행했지만 그렇다고 새 터전의 이민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낯설고 물 설은 곳에 와서 생김새, 언어,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의 대상이 되었다. 이식된 나는 언제나 외부 침입자로 분류되고, 새 주인의 몸에서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자가 면역’이 끊임없이 나를 밀어내기 위해 공격해왔다. 이런 공격을 조금이나마 중재해준 것은 면역억제제였다.

면역억제제는 새 주인의 몸에 있는 면역체계와 이식되어온 내가 서로 이해하며 같이 살아가도록 도와주었다. 여러 가지 약의 부작용쯤은 감수해야 했고, 각종 바이러스와 감염의 위험에도 노출되었다.

새롭게 시작된 여정에 역경은 있었으나 세월이 약이 되어 이식을 안정시켜 주었다. 그렇다고 일의 양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주인의 몸에서 하나뿐인 신장이기에 보통보다 2배의 일을 해오고 있다. 과중한 노동으로 나의 몸은 부서질 정도로 힘들다. 그럼에도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내가 쓰임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힘이 솟는다.

나의 주인은 결혼해서 콩팥이 건강한 2세를 낳을 것이다. 그렇다고 후손들에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으로 이식된 콩팥도 당뇨, 고혈압과 같은 지병으로 부터의 공격을 받는다. 이민 2세들이 이 땅의 무절제, 극도의 이기주의, 타락, 가정파괴 등의 공격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이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신장은 매년 1% 이상씩 기능이 감퇴한다. 세월이 지나면 이주해온 우리도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하는 일이 보람된 것은 이민동료들과 함께 생명 살리는 일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때문이다. “살만한 이유를 잃어버렸다”라는 이기적인 말은 우리가 반기는 말이 결코 아니다. 우리로 인해 생명이 살고, 살아난 사람이 그 가족과 친구를 위하여 자리를 지켜주는 것만도 얼마나 큰 기쁨인가?

신장이식을 절실하게 기다리는 많은 내 주인 친구들을 생각하며 이민온 이곳에서 맡겨진 일을 기꺼이 감당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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