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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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의 마지막 러브레터

2014-08-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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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교 수필가

베티는 이웃에 살고 있는 98세의 할머니다. 그녀의 남편 밀튼은 올해 103세가 되어 이 지역에서는 아마 최고령일 것이다. 놀라운 것은 아직도 그들은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밥해 먹고 운전하고 집안 청소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 쓰레기를 들고 나오는 밀튼을 보며, 아직도 요리가 재미있다고 익살을 떠는 베티를 볼 때마다 나는 거의 경외심을 느낀다. 그들의 긍정적인 마음과 적극적인 삶의 태도는 정말 존경스럽다.

얼마 전 밀튼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베티가 운전을 부탁한 적이 있다. 수퍼마켓에 장을 보러 가서 먹음직스런 체리 파이가 있어 베티에게 사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인즉 밀튼이 요즘 다이어트 중이란다. 100세가 넘은 노인이 얼마나 더 살겠다고 다이어트를 하는지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번은 그 부부가 “지진에 대비해서 마실 물과 여러 필요한 물자들을 준비해 두었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자 그들은 차 트렁크를 열어 음료수와 캔 음식들, 옷가지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아주 자랑스럽게.

나는 순간 머리를 한대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그들만큼 살려면 나는 아직도 25년 이상을 살아야 하는데 내가 너무 안이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정말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 남은 삶이 얼마인지 모르는 노인들에게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산다는 것은 아름답고 가치있는 일이다.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해주시고, 애지중지 키워 주시고, 사랑해 주신 부모님과 그 많은 손길들을 생각해 볼 때 남은 인생을 막 살아서도 안되고 대충 살아서도 안된다. 여기에 인생의 의미가 있다.

아침마다 산책을 할 때 가끔 마주치는 노인이 있다. 88세인 그는 댄스광이라서 지금도 매일 저녁 운전을 해서 시내로 춤을 추러 간다고 한다. 그의 삶의 목표는 116세까지 사는 것이라고 해서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함께 장보러 갔던 날 베티가 내게 고백을 했다. 얼마 전 마지막 러브 레터를 밀튼에게 썼다는 것이다. 내용을 물으니 “만약 우리가 죽어서 저 세상이 있다면 나는 그때도 밀튼을 사랑하겠다고, 그리고 밀튼이 먼저 죽는다면 나도 그 옆에 누워 그냥 죽음을 기다리겠노라고, 밀튼이 없는 이 세상에서 나는 살 수가 없다고…” 썼다고 했다. 그녀의 음성은 떨리고 눈가는 붉어졌다.

그 말을 듣는 나도 숙연해졌다. 마치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서로 스킨쉽을 한다. 함께 걸을 때면 꼭 손을 잡는다.

사랑은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상대방이 측은하고 불쌍하게 느껴진다. 오랜 세월을 함께 살며 미운정 고운정이 들어서 늙어가는 모습이 자신의 모습처럼 애잔하고 연연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젊었을 때 뜨겁던 사랑이 아름답게 기억 속에 살아 있다면, 늙어가며 마지막 삶을 함께 나누는 사랑도 그 못지않게 애틋하다.

누구와도 같은 날 함께 죽지는 못한다. 그러나 베티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둘이 손을 잡고 마지막 가는 길에 동행할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이다. 둘이 70년 이상을 사랑하고도 아직 사랑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베티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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