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님과 세월호

2014-06-0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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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한 / 부동산 중개업

어머님이 3월28일 돌아가셨다는 형님의 전화를 받았었지만, 여권에 문제가 있어 나는 4월15일에야 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98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어머니는 원래 12 자녀를 낳았었으나, 중간에 6명이 일찍 죽고 아들 셋에 딸 셋의 우리 6남매를 힘든 형편 가운데에서도 잘 키워주셨다.

입국한 다음날인 4월16일 한국에서는 세월호 사건이 터져 온 나라가 뒤숭숭하고 민심이 술렁거리면서 나도 덩달아 참담하고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에 우리 6남매는 인근의 한식당에서 모였다. 모두 함께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우리는 어머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와 노고를 기억하고 치하하며 감사하는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어머니는 비록 학교를 다니며 배우신 경험이 전혀 없고 생활형편도 어려웠었지만, 항상 근면하시고 지혜로우셔서 자녀들을 잘 돌보며 키우셨고, 이웃의 어려운 사람들에게도 후하게 인심을 베풀며 사셨었다. 인생의 기본진리는 간단하여 서로를 아끼고 돌보는 따뜻한 마음 하나만 있으면 얼마든지 넉넉하고 풍요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 어머님이 그 생생한 증인이시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어머님께서 남기신 유산 분배를 의논하는 시간이 되었다. 변호사인 막내가 서류를 형제자매에게 나눠주며 어머님이 남기신 재산이 2억4,000만원 정도 된다고 설명 하였다. 그리고 일인당 4,000만원씩 나누면 공평한 분배가 된다고 건의하였다.

나는 “그 동안 밖에서만 살아서 유산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 후 “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를 대신하여 지원해주신 형님께 보답하는 마음으로 천만원을 드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형님은 “그저 장남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거절하시고, 내가 거듭 강권하자 형님은 결국 그 돈을 5남매가 나누자며 똑같이 200만원씩 나누셨다.

그러자 다섯째인 여동생도 “그 동안 형제자매간의 우애와 사랑에 감사하여 나도 얼마를 내 놓겠다”며 2,000만원을 내 놓아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박수치며 환영하였다. 우리 6남매는 모두 흡족한 마음으로 어머님의 추억담을 한참 더 나누다가 가까운 노래방에 가서 어머님의 훌륭하셨던 삶을 마음껏 노래하며 즐긴 후 헤어졌다.

미국에 돌아와서 나는 이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자세히 알려주고 아내에게는 2만달러, 그리고 딸과 아들, 며느리에게는 각각 1,000달러씩 나누어 주면서 “할머니께서 너희들에게 유산으로 주시는 돈이니, 지혜롭고 넉넉하셨던 할머니의 뜻에 맞는 일에 잘 사용하라” 하고 말하였다. 아이들은 할머니의 뜻을 따라서 소중하게 사용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나머지 돈에서 도움이 필요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어머님의 말씀을 알려 주었고, 테니스 회원 약 40명에게도 저녁을 대접하면서 어머님의 삶을 알려주었다.

세월호 사고와 겹쳐진 열흘 동안의 한국여행에서 나는 자꾸 어머님의 삶과 세월호 사건이 대비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였다. 높은 학력, 권세나 신앙을 자랑하며 억지와 욕심을 부리다가 터무니없는 사고를 저지르는 배운 사람들 보다 글자 한자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지만 인간의 기본요소인 따뜻한 마음 한 가지로 풍요롭고 넉넉한 삶을 사셨던 어머님이 훨씬 더 위대하고 훌륭한 삶을 사셨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남은 우리 6남매가 돌아가신 어머님의 뜻을 깊이 새기고 잘 받들어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삶을, 서로 함께 아끼고 존중하며 사랑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우애 많고 사이좋으며 형제자매간의 긍지와 비전이 넘치는 그런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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