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므로 사랑을 먹어야 산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열고 내어주는 것이다. 이 사랑에는 온유, 인내, 포용, 겸손, 그리고 용서가 포함된다. 네브라스카 주에는 규모가 큰 고아원 ‘소년의 거리’가 있는데, 그곳에는 한 꼬마가 덩치가 두 배나 큰 소년을 등에 업은 조각이 있다. 그 조각에는 “그는 나의 형제이지요. 그래서 조금도 무겁지 않아요”라는 글이 새겨있다 한다.
사랑이 총괄적, 능동적이라면 그 한 부분 ‘용서’는 오히려 소극적 사랑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은 이상한 존재라 상대방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면 둘 다 흐뭇하고 행복한데, 이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실천하지 못한다. 손양원 목사가 가장 똑똑하고 믿음 좋은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 청년을 양자로 삼아 사랑을 주었다면, 우리도 웬만한 것은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우리는 용서하기가 그렇게 힘든가? 몇 년 전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더 용서받아야 할 존재란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상대를 용서 못해 복수의 칼날을 가는 사람은 마치 단검을 자기 자신의 가슴에 꽂고 점점 더 깊게 찌르는 것으로 비유한 분도 있다. 용서하지 못하면 사실은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행위임을 잘 깨닫게 해준다.
소금장사로 많은 재물을 모은 김수웅 장로는 피땀 흘려 애써 모은 사업자금을 몽땅 사기당한 후 그를 찾으면 죽이려고 늘 단검을 가슴에 품고 다녔다. 원한 때문에 급기야는 정신질환 증세가 생겼고, 병원에서 신실한 기독교인 정신과 의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드디어 그 사기꾼을 용서해 주기에 이른다.
그 후 차차 믿음이 자라며 사업도 번성하여 지금은 그 재물을 주로 선교 사업에 쓰고 있다. 만일 이 사람이 용서의 훈련을 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얼핏 생각하면 용서를 비는 사람은 초라하고 낮아질 것 같지만 사실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남을 끌어내려도 자기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며, 남을 칭찬하면 자기는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칭찬의 대상과 함께 커지는 것이 인생의 법칙임을 배웠다. 그런데도 종종 우리는 그 알량한 자존심을 앞세우고 화목보다는 반목, 칭찬보다는 헐뜯음, 그리고 용서보다는 복수의 이를 간다. 참 슬픈 일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중 하나는 자유의지이다. 이 자유로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고, 또는 그 영혼이 풍성하게 할 수도 있다. 사랑은 살리는 보약이요, 미움과 질시는 죽이는 독약이다.
기독교인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같은 교회 형제, 자매의 조그만 잘못도 용서 못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우리가 예수의 이 사랑을 늘 기억한다면, 큰 빚을 탕감 받은 우리끼리 서로 용서하기가 좀 쉬워지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닥치는 죽음의 침상에서 그렇게 억울해 용서 못하던 일을 생각한다면 그 순간에도 똑같은 생각이 들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