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얼굴과 이름

2014-03-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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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상 / 전 언론인

미 대륙 원주민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구제할 길 없는 야만인들’이라고 한 다른 백인들과 달리 그나마 대량 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극소수 인디언 어린이들에 대한 자비심과 동정심에서 이들을 서구인 화 하려고 애썼던 한 백인이 있었다.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재향군인 리처드 프라트는 펜실베니아주 카라일에 ‘인디언 아이들을 위한 프라트의 카라일 학교를 설립, 미국 각지의 인디언 부락에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입학시켜 이들의 머리를 자르고 서양식 교복을 입히고 세례를 받게 해준다.

이 가운데 한 아이가 이러한 경험을 기록해 놓고 있다. “난 이제 더 이상 인디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백인의 모조품 같다.”


몇 년 전 미국병원에서 해산한 조카며느리를 다른 가족들과 같이 방문했다. 신생아실에 있는 갓난애를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면서 아이 이름 지었느냐고 아기 아빠 보고 물었더니 그는 대뜸 ‘조지’ 라고 한다.

애기 이름은 물론 부모나 조부모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다. 그리고 현재 미국에 사는 한인자녀들이 서양이름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런데도 한인 아이들이 서양 이름을 가지면 어쩐지 타고난 얼굴 생김새와 이름이 맞지 않아 본인은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 어색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것만 같다. 하긴 1.5세나 2세 자신들은 미국 이름 갖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 자연스럽게 느낄 지도 모를 일이다.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은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중국 화교 출신으로 첫 주중 미국대사를 지낸 게리 로크(64) 씨가 지난 3월1일 퇴임에 앞서 중국관영 매체의 원색적인 비난을 받았다.

중국신문사는 2월28일 ‘잘 가시오, 게리 로크’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그를 ‘썩은 바나나’로 지칭했다. 겉은 노랗고 속이 하얀 바나나는 생김새와 달리 자신을 서양인으로 생각하며 사는 아시아인을 비하할 때 쓰는 말이다. 이 사설은 “바나나는 오랫동안 놔두면 껍질은 썩고 하얀 속살도 까맣게 변한다”며 “화교 3세인 로크 대사가 미국 입장만 대변했다”고 비난했다.

이를 같은 동양인의 입장에서 풀이해보자면 인과 덕을 으뜸으로 삼는 동양 왕도(王道) 대신 인의(仁義)를 경시하고 무력과 금력을 중시하는 서양 패도(覇道) 패권주의의 앞잡이 광대라고 조롱한 것이다.

한편 세계적인 음악가로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활약해온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남매들같이 한국인으로서 한국 이름을 그대로 쓰면 얼마나 더 떳떳하고 당당하며 자연스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한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다워야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지킬 때 말이다. 원숭이처럼 남의 흉내나 내지 말고. 자기 자신을 잃고 자기 고유의 개성과 인격을 버리고 나면 그런 나라나 민족 또는 개인에게는 참다운 ‘외교’나 정정당당하고 대등 공평한 대외 관계를 맺을 주권이 없는 셈이다.

그런 만큼 한국 사람이라면 남한에 살고 있든 북한에 살고 있든 아니면 미국에 살고 있든 누구나 한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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