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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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방향

2014-03-24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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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봉 / 수필가

김완하의 시 ‘역방향’을 다시 읽는다. 평생 기차가 가는 순(順)방향만 고집하며 살아온 나는 이제야 자리를 털고 역방향으로 옮겨 앉아야 할 의미를 알아차린다. 역방향으로 앉아 쓴 글에는 예전엔 보지 못했던 세상 속 모습이 보인다.

“마주 보고 가지만 / 그대 눈동자에 실려간다 / 나의 시야가 닿는 곳은/ 그대 머물다 간/풀과 꽃과 나무다.”

몇년 전의 일이다. 아주 오랜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옛날처럼 기차를 타고 어릴 적 피난 가서 자랐던 부산으로 내려갔다. 옛 항구의 중심은 비릿내 나는 남포동 뒷골목 자갈치 야시장이었다. 야외 가스등 휘황하던 그 열기는 이미 광안리라는 세련된 바닷가로 옮겨 앉았고, 용두산에서 바라보던 영도다리는 옛 멋을 잃었지만 늘 고향처럼 그리웠다.


기차여행에 죽마고우와 동행했다. 우리는 차창 밖으로 흘러가던 산하의 옛 풍경들과 순간들을 되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고교 입시 보러 친구와 서울행 새벽열차를 타고 가던 길. 한참 졸면 삼랑진을 지났고, 깨어서 몇시간을 차창밖 풍경에 넋을 놓고 있으면 나를 업어키웠던 순이의 고향 김천에 닿았다. 누이의 따스한 등짝이 그리웠다.

대전역에서 모락모락 국수말이가 먹고 싶었지만 가난한 어머니가 삶아주신 계란 두알을 꾸역꾸역 씹으며 천안 삼거리를 지났다. 저녁어스름이 되어서야 여기는 수원입니다 하는 여객전무의 목소리에 서울이 가까워 왔음을 알았다. 입술이 마르고 오금이 저려왔다.

친구는 오랜만에 한국에 온 나를 KTX에 태웠다. 처음엔 고속력이 신기했지만 그 속도감에 차창을 스쳐가는 풍경들을 채 볼 수가 없었다. 산천의 정겨운 모습들과 색깔들이 눈길에 닿지도 못하고 여우꼬리처럼 재빨리 사라졌다. 나는 일어나 친구의 맞은편에 옮겨 않았다. 기차가 가는 역방향이었다.

그 때 친구의 눈에 비친 고향 산천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풀과 나무, 구름이 하늘하늘 흘러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풍경들은 슬로우 모션으로 흘러갔다. 옛날에 열차를 타고 가며 보았던 느릿하고 편한 속도로 흘러갔다. 친구의 눈을 자세히 그리고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동공 속에서 어린 내가 뛰노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구름과 노니다가 들어선 학교 담벼락 합격자 명단에는 우리 이름들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심장이 꽃잎처럼 떨렸다.

“그대의 시선/ 저편 능선을 넘어가/다음 계절에 가 닿아도/나는 아직 땅에 눕기 전/ 꽃잎의 떨림에 멈추어 있다.”

역방향은 순방향과 우선 시각이 다르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에 비춰진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순방향이 나라는 주체와 사물만 있는 2차원의 세계라면, 역방향은 나와 풍경과 친구가 있는 3차원의 세계이다.

순방향은 내가 현재의 시간을 지나는 평면적인 2차원이라면, 역방향은 마치 허공을 날 듯, 내가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넘나드는 입체적인 3차원의 세상이다. 그래서 역방향은 훨씬 역동적이고 초월적이고 환상적이다.

나의 삶도, 글도 역동적이길 원한다. KTX같이 쏜살같이 살아가는 지금, 세월의 속도감에 멀미가 나거든 나처럼 역방향으로 앉아 볼 일이다.

“그대가 비운 그리움이여/ 내가 머무는 이 가파른 시간은/ 어느 누구의 기다림인가/스쳐간 시간의 어느 끝자락인가/ 그대와 마주 보고 가지만/ 나는 그대 눈동자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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