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잘 아는 목사의 장례예배에 참석했었다. 고인의 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드린 후 잠자듯 누워있는 고인의 얼굴을 보았다. 장의사에서 곱게 화장을 해주어서인지 눈만 감았지 살아있는 사람처럼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이름을 부르며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일어나지 않았고 잠자듯 누워만 있었다.
발인예배가 끝나고 장지에 가서 하관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그날 죽음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중국의 공자는 한 제자가 죽음에 대해 질문하자 이런 말을 남겼다. “왈미지생 언지사(曰未知生 焉知死)” 논어의 ‘선진편’에 나오는 말로 뜻은 “아직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이다. 유교적 답변으로 짤막하지만 많은 뜻이 담겨있다.
생(生)도 모르고 우왕좌왕 살아가는 판에 생이 다하여 죽은 다음의 일은 알아서 무엇 하랴는 식의 참으로 공자다운 답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깊이 그 뜻을 생각해 보면 살아있는 동안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고 열심히 살아, 사람으로서의 본분과 직분을 다하라, 그리고 죽음은 죽음 다음에 맡기라 란 뜻일 것 같다. 현명한 대답이다.
<장자> ‘대종사’ 편에 보면 삶과 죽음에 대한 간단한 이해가 나온다. “옛날의 진인은 삶을 새삼 기뻐할 줄 모르고, 죽음을 새삼 미워할 줄도 모른다. 태어남을 기뻐하지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는다. 무심(無心)히 자연을 따라가고, 무심히 자연을 따라올 뿐이다. 그 태어난 시초를 모르고, 그 죽은 뒤의 끝을 알려 하지 않는다. 삶을 받으면 그것을 기뻐하고, 죽으면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장자> ‘지북유’ 편에 보면 이런 말도 있다.
“삶이란 반드시 죽음을 뒤따르게 하며 죽음은 삶의 시작이 되오. 이렇게 삶과 죽음은 되풀이되므로 누가 그것을 관장하는지를 어찌 알겠소? 기(氣)가 모이면 삶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죽음이 되오.”
자연주의 철학이 흠씬 배어있는 장자철학에선 죽음은 모아졌던 기(氣)가 다시 흐트러지는 것으로 자연에서부터 온 우리네 몸은 죽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감을 지적하고 있다. 결코 인간을 우주만물의 영장으로 보질 않는 것이 장자철학의 근간을 이룬다. 기가 모아진 우리네 몸도 천지의 한 부분일 뿐 내가 내 몸의 주인이 아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죽음 관은 장자의 동양사상과는 다르다. 사람이 죽으면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육신은 죽어 땅 속에 묻혀 자연으로 돌아가나 영혼은 살아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기독교에선 천국과 지옥, 불교에선 극락과 지옥이다. 천국과 극락엔 영원한 즐거움이, 지옥엔 영원한 형벌이 따른다. 티베트의 <죽음의 서:The Book of Death>에 보면 삶을 착하게 살면 극락에 가고 삶을 악하게 살면 지옥의 아귀로 떨어진다.
65년의 생을 살다 며칠 전 떠난 목사의 장례식에서 본 평온했던 그의 얼굴. 하관예배에서 구슬피 울던 그의 딸의 모습.
어쩌면 우린 모두 죽음을 위해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결코 삶과 죽음은 떨어질 수 없는 것. 우주 안에서 살고 우주 안에서 죽기 때문이요 삶과 죽음은 우주 안에 모두 들어 있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