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산의 철학

2014-02-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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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진 시인

산에는 정적과 고독이 있다. 태고로부터 끝없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서 부동하는 자세와 청정한 모습으로 하늘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겸손의 모습이 흘러 넘치기 때문에 선인들은 예로부터 산정사태고(山靜似太古)를 음미하고 청풍명월이 깃을 펴는 영원의 고향 속에서 참선의 도와 인내를 배웠다.

인간은 자신의 나약과 부족을 절대자에 의지하려는 마음을 앞세우고 기암과 고목, 폭포와 절벽이 어우러져 산경을 이룩하고 춘풍추우 폭풍한설 속에서도 고고한 자태와 지존의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는 산을 찾아서 그 속에서 간구하고 기도하며 명상하는 습성을 키워왔다.

억만년의 세월 속에서 내 여기 쉬어 가겠노라고 웅자로 버티는 도도한 산의 자태, 무수한 생명들이 산을 찾아왔다가는 그 깊은 속마음에 심취되어 마침내 그도 산이 되고 만다. 


산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때엔 교만한 것 같고 잠들어 있는 것 같으나 일단 그 품에 안겨 보면 봄의 빛과 여름의 힘과 가을의 향기와 겨울의 소리에 이내 반하여 종래는 침묵하게 된다.무궁한 세월을 같은 모습으로 버티고 서있는 거대한 뚝심과 무뚝뚝한 것 같은 외모와는 달리 새들의 울음과 나비의 몸짓과 맹수들의 포효 그리고 천년을 소리 내어 울어 가는 물소리를 들어주는 인내와 무한한 도량이 있다. 

하늘을 찌르듯 솟아오른 곧은 의지, 모든 것을 수용할 듯 우람한 능선,차가운 솔바람 소리도 종래에는 깊은 잠으로 머무는 그윽한 계곡이 있다.한순간 속에서도 열두 가지 생각에 잠기는 범부라도 산길을 오르다 보면 세심(洗心)의 염이 생기고 정혼(淨魂)의 마음이 솟으며 수신(修身)의 도가 떠오르는 듯하다.

산 자체로서는 변하는 바가 없으나 사계를 도는 자연의 질서가 철을 달리하며 행장을 풀려 하기에 그 모습이 주야, 춘하추동으로 달리 느껴진다.같은 산을 가지고도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고 다르게 이름을 지어 부르는 우리 선조들의 그 멋과 풍미도 여기에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산은 아버지의 위엄과 어머니의 자비와 절대자의 신성불가침의 경지를 일깨워 주는 영원한 스승이다. 산은 그 자체가 청순하기 때문에 공해가 없고, 그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에 허욕이 없고, 그 모습이 단아하기 때문에 가식이 없다. 산이 좋아서 산을 찾는 인간들의 발길이 오히려 산과 인간들에게 공해가 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산은 선과 통하는 길이요, 도와 통하는 길이고, 시와 통하는 길이며, 예와 통하는 길이다.

시인 김삿갓(병연)은 기암절벽 바윗등에 홀로 웃고 서있는 한 떨기 꽃을 바라보면서 감동을 금치 못하였고, 세속을 떠난 인간의 마음을 산중문답으로 달래며 세진을 털고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동가식서가숙 할 수 있었으니 뛰어난 도인임이 분명하다.

“산도 깊고 물도 깊고 나그네 마음도 깊다”를 읊으며 음풍농월(吟風弄月)을 노래한 것도 풍찬노숙의 무 집념과 해탈 속에서의 고고한 경지로 받아들여야 할 듯하다.

고고히 서있는 산에는 웅변의 빼어남을 넘는 침묵의 고귀함이 있고, 자존망대의 교만을 넘는 은인자중(隱忍自重)의 철학이 있으며, 일확천금을 꿈꾸며 좌충우돌하는 인간들을 향하여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계명을 일러주는 위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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