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 모두 불사조 아닌가

2013-12-2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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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상 전 언론인

또 한해가 저무는 연말이면 사람들은 감상적이 되어 여러 가지 상념에 젖게 된다. 특히 인생의 겨울철을 맞은 사람들은 좀 더 깊이 삶을 반추하며 숙고하게 되는 것 같다.

이 맘 때면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시 한 편이 생각난다. ‘올해는 바람에 낙엽이 일찍 진다/ 내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나는 늙어만 가고 오! 오! 슬프도다./ 사람들은 나서 죽고/ 너도 나도 곧 죽으리니/ 우리 죽은 셈치고 살아보세.’이 시구에서처럼 우리가 벌써 죽었다 치면 새로 맞는 하루하루를 덤처럼 고맙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정말로 우리가 덤처럼 사는 삶을 어떻게 살면 좋을까. 말할 것도 없이 주어진 삶을 짐이 아닌, 축복으로 누려야 하겠다.

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르키(1868-1936)의 ‘태양의 아이들’에 나오는 꿈꾸는 과학자 파블은“우리 집에서는 살기 재미있다”고 말하는데 그가 재미있다고 하는 일들 가운데는 자살, 광기, 농민의 봉기, 실연 등이 있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너 나 할 것 없이 프랑스 작가 빅토르 휴고의 명작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 못지않게 기복이 많은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이러한 삶이 더 살아볼 만한 것이 아닐까. 순탄하게 일생을 순풍에 돛단 듯 무사안일, 무사태평하게 사는 것보다 말이다. 진정 쓴 맛을 본 연후라야만 단 맛을 단 맛으로 느낄 수 있다면 슬픔과 고통과 고독을 모르고는 참사랑과 기쁨을 알 수 없으리라.

또 한 마을, 한 도시, 한 지방, 한 나라에서만 사는 것보다 타향살이 타국생활도 해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늘 같은 한 계절만 있는 상하의 열대지방이나 늘 꽁꽁 얼어붙어 있는 북극(또는 남극)지대에서만 살기보다 사시사철 골고루 있는 곳에서 인생의 춘하추동 다 겪으면서 제 가족, 제 동족, 제 인종을 떠나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려 살아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극과 극은 통한다 하지 않던가.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버릴 것, 마다할 것, 피할 것 하나 없다.

물도 좋고, 불도 좋고, 산도 좋고, 바다도 좋고, 하늘도 좋고, 땅도 좋지 않은가. 천당도, 지옥도 다 좋지 않은가. 천국도 물론 좋지만 지옥 없는 천국이 무슨 소용이며 무슨 의미가 있으랴.

가을에 낙엽이 져야 봄에 새잎이 돋듯 사람도 죽어야 또 태어나고 넘어져야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오,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라”고 예수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세상에 ‘불사조’ 아닌 게 없는 것 같다. 저 아라비아 사막에서 수백 년을 산 다음 화장하는 장작불더미에 올라 스스로 분신해 타죽었다가 바로 그 잿더미 속에서 새로 태어나 되살아난다는 이집트 신화에 나오는 신조(神鳥) 피닉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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