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섣달 그믐날

2013-12-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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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봉 수필가

“새해 와서 앉으라고/ 의자를 비워주고 떠나는/ 허리 아픈 섣달 그믐날을/ 당신이라 부르련다..” 연전에 이곳에 오셨던 김남조 시인께서 주신 시집을 꺼내보다가 ‘섣날 그믐날’이란 시를 다시 찾았다. “허리 아픈 섣달 그믐날”이란 싯구에 마음이 멈칫거린다. 한 해를 보내며 마음도 몸도 시큰거리는 세모이다.

오늘은 지인들과의 송년모임이 있는 날이다. 십수년 동안 자주 만나 삶을 나누고 여행도 함께 다니는 모임이다. 처음엔 10가족 모두 꽤 젊은 청장년들 이었는데 이젠 모두 초로를 지나며 깊어지는 주름과 시린 허리가 익숙한 사이가 되었다.

열 사람 모두 직업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나 종교도 다양하지만, 글과 음악, 여행을 좋아하는 취미와 서로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하는 심성들이 통해 한결같이 지내오고 있다. 그 동안 타지로 이사한 가정도 있고, 안타깝게도 지병으로 타계한 분들도 계시지만, 남은 사람들은 소식이 뜸하면 서로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나는 막내 격으로 별 특기가 없지만 모임의 활기를 북돋우는 치어리더를 자처하고 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같은 돈 얘기가 화제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건강이나 노년의 삶이 화두의 중심이 되었다. 이제 모두 철이 든 증거라고 자찬하는 것도 내 몫이다.

오늘은 좌장 선생님이 70대 중반에 치매증세를 앓는 부인을 간호하는 친구 이야기를 하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 노부부의 간증이 생각났다. 미국 어느 도시의 수잔 앤더슨이란 여인이 어느 날 눈수술을 받다 그만 실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을 놓을 수 없는 형편이기에 남편은 아내의 직장 출퇴근을 도와주게 된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이 말했다. “여보! 계속 이럴 수 없으니 내일부터는 혼자 출근해요.”그 말에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낀 아내는 이를 악물고 혼자 통근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 넘어지며 서러워 눈물도 흘렸지만 점차 출퇴근이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버스를 탔을 때 운전기사가 무심코 말했다. “부인은 좋겠어요. 좋은 남편을 두셔서요. 매일 한결같이 부인을 살펴주시네요.” 알고 보니 남편은 아내가 버스를 타면 뒷자리에 앉아 아내의 출퇴근 길을 말없이 등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때로는 넘어지고, 서러운 눈물도 흘리고, 상처와 외로움도 있지만, 그 때마다 나의 등 뒤에선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다. 돌이켜보면 나의 고백이기도 하다. 아무도 날 사랑하는 이가 없는 것 같았던 순간에도 나를 묵묵히 지켜주시는 큰 사랑의 힘으로 살아왔다.

세월이 갈수록 사랑하는 이들을 서로 지켜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져본다. 내 분신 같이 허리 아프고 눈 침침한 섣달그믐 날을 연민의 정으로 보낸다. 그리고 내 뒤에서 변함없이 지켜주는 큰 사랑을 믿고 바라며 희망 찬 새해를 맞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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