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13-12-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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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운택 자유기고가

바야흐로 술 마실 일이 많아지는 계절이 돌아왔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즈음이면 동창회, 친목회, 동호회, 계모임 등 각종 모임의 기회가 많아지고, 이 때 거의 빠지지 않는 것이 술이다. 술은 이런 모임에서 대화의 촉매역할을 해주고, 그 자리의 흥을 돋워 준다. 한국 술 박사 1호로 알려진 중앙대 정헌배 교수에 따르면, 술은 원래 ‘물의 모양을 가진 불의 성격의 물체’를 뜻하는 ‘수불’에서 시작했다가 세월과 함께 단순화되어 ‘술’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술을 마시는 방법도 문화적 배경에 따라 차이가 있다. 서양 사람들은 주로 혼자서 제 술잔에 스스로 자기가 따라 마시는 ‘독작(獨酌)’ 또는 ‘자작(自酌)’을 한다. 상대방에게 술은 권하되, 자기 잔만으로 마시는 것을 ‘대작(對酌)’이라 한다. 같은 대작의 경우에도 러시아 사람들은 술을 마시기 전에 건배를 하는 ‘음전대작’을 하고, 중국 사람들은 술을 마신 후에 건배를 외치는 ‘음후대작’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마신 잔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서로 잔을 주고받기를 좋아하는데, 이런 주법을 ‘수작(酬酌)’이라고 한다. 그런데, 수작은 일단 잔을 받으면 빨리 마시고 돌려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음주속도가 빨라지게 되고, 또 자기의사와 관계없이 계속 잔을 받게 되어 자기 주량 이상으로 과음을 하기 십상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주행태는 한마디로 ‘폭탄주 문화’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술자리에 앉으면 무조건 술잔을 돌리고 폭탄주를 강요받는다. 그래서 술자리모임에 갈 때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심지어 미리 약을 사먹고 가서는 전투를 하듯 비장한 각오로 술을 마실 때가 많다.

그런데, 우리의 음주문화가 원래부터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 하에 있던 1929년 2월1일에 우리 문인들이 만든 ‘술나라 헌법’이란 것이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아주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음주유형을 기준으로 다섯 가지 등급의 귀족 작위를 규정하고 있는데, 술잔을 잘 비워 먹는 사람을 공작(空酌), 큰 잔으로 두둑이 먹는 사람을 후작(厚酌), 100잔을 능히 마시는 사람을 백작(百酌), 자기 손으로 부어 마시는 사람을 자작(自酌), 함부로 부어 마시는 사람을 남작(濫酌)이라고 했다.

헌법 제12조에는 술을 마시기 적절한 시기도 규정하고 있는데, 천리 타향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 바람이 비껴 불고 이슬비가 내리며 저녁노을이 질 때, 눈 내린 달밤에, 꽃이 피거나 낙엽이 질 때, 근심 걱정이 많거나 슬프고 애처로울 때 등 감상적인 분위기에 젖거나 희로애락이 찾아올 때 한 잔의 술이 필요하다고 규정해 놓아 읽는 이들을 미소 짓게 한다.

술은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절제된 상태로 적당히 마시면, 건강을 증진 시키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주고,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며, 식욕을 증진시키고, 기분을 좋게 해주고,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며, 괴로움을 잊게 해준다.

이에 반해 무절제하게 과음하거나 폭음을 하게 되면, 건강을 해치게 되고, 분위기를 깨고, 남을 괴롭히고, 안전사고를 내기 쉽고, 범죄를 쉽게 저지르기도 하며, 알코올 중독이 되어 패가망신을 하기도 한다.

술은 우리말 뜻 그대로 ‘불의 성격을 가진 물’이다. 그래서 술은 일단 마신 후에도 불처럼 잘 다스려야 후환이 없다. 잘 못 다스리면, 술이 가진 불의 속성이 그 사람을 태우고, 그의 가정을 태우고, 그 사람이 속한 사회를 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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