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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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2013-11-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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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진의 주말산책

늦가을은 중환자실이다. 나는 요즘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심신이 아프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이 무계절의 도시에도 잿빛 크레용으로 문질러 놓은 듯한 가을의 색깔이 점점 더 초죽음의 표정을 지으면서 중환자실의 알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저절로 병이 들겠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꾸만 더 계절을 타는 것인지 꼭 내 나이 또래인 늦가을을 아침저녁으로 대면해야 하는 요즘 나는 거울조차 보기 싫을 정도로 게을러진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가을이 오면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니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이 계절에다 대고 온갖 공치사를 했었다. 계절 핑계대고 센티멘탈리티를 자탄하면서 즐겼었는데 이젠 그게 아니다. 삶의 누적물이 천근만근으로 나를 짓눌러대 피곤하기만 하다.


마치 기본체중 45kg을 간신히 통과해 논산훈련소에 신병으로 입대한 뒤 미군의 잉여물자 유물인 M1 소총을 들고 총검술 훈련을 할 때처럼 세월을 들고 있는 팔이 떨어질 것만 같다.

이런 현상을 늦가을 병이라 치고 이 질병을 고치는데 제법 효험이 있는 약은 음악이다. 먼저 듣고 싶은 음악이 폴란드의 헨릭 고레츠키가 작곡한 교향곡 제3번이다.

‘슬픈 노래들의 교향곡’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곡은 전 3악장이 매우 느린 렌토로 이어지는데 소프라노의 독창을 오케스트라가 반주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가사는 15세기 수도승의 만가와 어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의 호소 그리고 나치의 수용소에 수감됐던 18세의 폴란드 여인이 감방 벽에 쓴 마리아를 향한 짧은 기도로 마련돼 있다.

교향곡은 슬프고 고통스러운데 이런 슬픔과 고통은 단순히 슬프고 아픈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것들을 초월해 우리에게 평화와 위로를 주고 있다. 비실비실 앓다가 소생하는 조용한 기쁨을 느낄 수가 있다.

이어 듣고 싶은 음악이 일본의 클래시컬 음악 작곡가이자 영화음악 작곡가인 토루 타케미추의 가을 모음집 ‘가을 정원에서’(In an Autumn Garden)이다. 소리들의 그림이라고 표현되는 타케미추의 음악은 특별한 음악적 구조나 강렬한 리듬이 배제된 채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데 그저 불현듯 들리는 소리와도 같다고 하겠다.

모음집은 ‘가을 정원에서’ ‘항해’ ‘가을’ ‘11월의 계단들: 10번째 계단’ 및 ‘일식’ 등 모두 5편으로 짜여졌다. 호소와 울음과 고요와도 같은 무수한 음들이 아우성을 치는 듯한 음악으로 소리의 화랑 안에서 소리들의 파노라마를 목격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불협화음과도 같은 음들이 온갖 자연음과 섞여 저무는 계절의 쇠락미와 사유를 연무처럼 자아내고 있다.


남들이 들으면 ‘또 그 노래야’ 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요즘 차를 타고 다니면서 CD로 듣고 있는 노래가 ‘세프템버 송’이다. 독일의 쿠르트 바일이 작곡하고 미극작가 맥스웰 앤더슨이 작사한 이 노래는 뮤지컬 ‘니커바커 할러데이’에서 월터 휴스턴(감독 존 휴스턴의 아버지)이 처음으로 불렀다.

피곤하고 애수가 깃든 노래는 중년의 유부남(조셉 카튼)과 아름다운 여류 피아니스트(조운 폰테인)의 못 이룰 사랑을 그린 ‘세프템버 어페어’(September Affairㆍ1950ㆍ사진)에서 휴스턴이 나폴리의 언덕 위에 있는 카페의 축음기에 올려놓은 음반을 통해 녹슨 쇳소리의 떨리는 음성으로 부른다. 속병 나게 시리 쓸쓸하고 아름다운데 “가을 날씨가 나뭇잎들을 불태우면 이미 기다림의 놀이를 할 시간은 없답니다”라는 가사가 매우 로맨틱하다.

음악을 듣고 나선 릴케와 헤세의 시를 읽고 싶다. 두 사람 모두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좋아하던 시인들로 그들의 가을 시는 우수에 차 있고 종말적이다.

릴케는 ‘가을 날’에서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라면서 “혼자인 사람은 또 그렇게 오래 홀로 남아서 잠 못 이루고 책을 읽거나, 긴 편지를 쓸 것이며 그리고 나뭇잎이 흩날리는 가로수 길을 무거운 마음으로 소요할 것입니다”라고 조락의 계절을 영탄한다.

헤세도 ‘가을’에서 “이윽고 거두는 죽음의 신이 오며, 이윽고 잿빛 요괴가 와서 웃으면 우리의 가슴은 얼어붙고 꽃들은 화려함을 모조리 잃으며 생명은 광채를 모조리 잃게 된다”면서 “이윽고 우리는 티끌이 되리니”라고 ‘티끌에서 티끌’이 돼야 하는 우리 삶의 부질없음을 노래한다.

음악을 듣고 시를 읽은 다음 다 큰 딸과 아들 키우느라 수고하는 홀아비의 얘기인 야수지로 오주의 ‘가을 오후’(An Autumn Afternoon·1962)를 보고프다. 오주의 계절 이름이 붙은 영화들은 다 좋다.

늦가을은 우리의 생명력을 빼앗아가는 아름답고 위험한 사이렌들이 부르는 노랫소리다. 치명적으로 매혹적인 사이렌들의 노래를 듣는 무기력감이 오히려 쾌적한 계절이다. 그리고 늦가을은 나훈아가 부른 ‘부모’가 생각나는 철이다. 모든 것이 죽어가는 이 계절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편집위원/hjpark12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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