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생의 단풍

2013-11-1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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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봉 수필가

요즘은 가을 단풍이 그립다. 젊어선 태양이 뜨거운 바다가 좋았는데 요새 이맘때면 단풍이 은은히 불타는 가을 심산에 가고 싶다. 나이 들면서 단풍같이 아름다운 노후를 흠모해서일까.

단풍이 아름다운 건 그 잎에 묻어난 연륜 때문일 것이다. 젊어선 모든 잎들이 푸를 뿐이지만 단풍은 살아온 삶의 빛깔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세월이 녹은 잎은 앵두보다 붉기도 하고, 노릿노릿 잘 익은 옥수수 빛이거나, 포도보다 농익은 자줏빛이기도 하다. 백지로 태어난 삶에 평생 어떤 그림을 그리며 살았는지 단풍잎은 보여준다.

납북당한 아버지의 막내 여동생인 고모님이 이젠 구순을 바라보신다. 뉴욕 맨하탄 건너 루즈벨트 섬의 단아한 노인아파트에 홀로 사신지 근 20년째다. 4-5년 전, 잠시 출장 중에 들렀을 땐 지팡이에 의지하신 채 지하철을 타고 32가 코리아타운까지 내려오셨다. “네 아버진 평양냉면을 참 좋아하셨단다.” 고모님은 사리를 듬뿍 내 그릇에 덜어주셨다.


큰 아들 내외가 사는 이스트 60가에서 루즈벨트 섬으로 가는 케이블카를 탔다. 아들은 메모리얼 암센터 펠로우 과정 중에 짬을 내어 우리를 청해주었다. 그 덕에 두살배기 손주와 함께 고모님을 뵈러간다. 세계의 용광로 같이 펄펄 끓는 맨하탄을 바로 곁에 두고도 이 나지막한 섬은 은둔자의 뒤뜰처럼 평온하다.

약간 치매를 앓으심에도 다행히 고모님은 나를 알아보셨다. “고맙다. 네 손자까지 함께 왔으니 4대가 모였구나.” 고모님의 미소가 한줄기 햇살처럼 반짝 빛났다. 가문의 소중한 유산이란 끈끈한 피붙이 정의 대물림일 것이다.

섬의 강변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맨하탄의 풍경은 유명 사진작가 스텐리 쿠브릭스의 작품처럼 구도가 강렬하고 선명하다. 대리석 빛 유엔 빌딩과 그 뒤에 정렬한 높고 낮은 마천루들이 거센 흡입력으로 주위의 에너지를 모두 빨아들이는 듯한 조형미를 발산하고 있다.

섬의 맨 끝 삼각지까지 걸어 작년에 준공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자유공원에 들어섰다. 공원은 희디 흰 화강암 보도 곁에 세워진 청동 두상과 두 줄로 늘어선 카퍼비치 나무들이 전부다. 극도의 절제미가 경건함을 자아낸다. 사후에 빛을 본 전설적인 루이스 칸의 설계라고 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41년 미 국민과 세계 인류가 누려야할 4가지의 자유를 선포하였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에서의 자유, 그리고 공포에서의 자유. 돌아보면 나는 꼭 40년 전, 빈곤과 결핍에서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온 셈이다. 너그러운 미국은 우리 같이 가난한 동양의 이민자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었고, 내 자식들도 책임있는 민주의식을 소유한 시민으로 키워주었다.

떠나오기 전날, 뉴욕에 사는 한 문우와 연락이 되었다. 그는 우리 부부에게 단풍구경을 시켜주었다.

“단풍이 아름다운 건 버릴 줄 알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무가 엄동설한 겨울을 잘 날 수 있도록 잎은 자랑스럽던 푸른 엽록소도 버리고, 양분도 열매에게 다 내어주고 떨어질 준비를 하는 것이겠지요. 우리 인생도 푸르렀던 젊음과 삶의 지혜와 신앙을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다 주고 떠나야겠지요. 가기 전에 단풍처럼 멋있고 아름다운 모습을 후세들에게 보여주는 게 우리들의 궁극적인 꿈이 아니겠습니까?”뉴욕의 가을 하늘아래서 인생의 단풍을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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