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눈물의 시인, 아버지를 그리며
2013-11-18 (월)
금년은 나의 아버지 다형 김현승시인의 탄생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당신이 돌아가신지 어언 40년이 다가오지만 평소 선친을 흠모하고 따르던 제자들과 그분의 시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기념시비제막과 다형 문학제를 열게 되어 아내와 함께 그 행사에 초대받아 지난 10월 한국을 다녀왔다.
1913년 평양에서 목사의 둘째아들로 태어나신 아버지는 숭실전문대 재학 중 양주동박사의 추천을 받아 1934년 동아일보를 통해 문단에 등단을 하셨고 1975년 4월의 봄날, 당신의 모교이자 봉직하셨던 숭실대학 채플 기도시간에 쓰러져 돌아가실 때까지 62년을 사시면서 300여편의 시를 남기셨다.
그 중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가을의 기도’가 있는데 유난히 가을을 주제로 한 시들을 많이 쓰셔서인지 가을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시의 첫 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이 시의 마지막 ‘겸허한 모국어’가 나에게는 특별히 다가온다. 시인에게 있어 모국어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의 말로 시를 쓰시던 아버지는 신사참배문제로 옥고를 치르시기도 하고, 또 당신이 다니 시던 숭실대마저 신사참배거부로 폐교당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고난을 많이 겪으셨다. 마침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면서 창씨개명 등 한글문화말살 정책이 시작되면서 아버님은 그토록 사랑하시던 시 작업을 해방되기까지 7년 동안 절필하실 정도로 우리의 모국어가 당신에겐 그토록 소중하였다. 그러기에 ‘가을의 기도’ 첫연에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라고 쓰신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올해부터 다시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키게 되어 각종행사가 준비 중인 광화문 광장에 나가봤더니 문화융성의 달인 10월을 맞이하여 세종대왕의 동상 좌우의 고층빌딩에는 대형 현수막들이 걸렸고 거기엔 한국을 대표하는 다섯 시인들의 시가 각각 쓰여져 있었다. 이중 KT 빌딩에 걸린 현수막에 바로 이 ‘가을의 기도’가 있었는데 이 시가 모국어, 즉 한글의 의미를 이 가을의 계절에 맞춰 가장 잘 표현했기 때문에 고르게 되었다는 설명을 그 작품을 만드신 분으로부터 들었다.
아버님의 묘비에는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눈물이고저’라는 싯귀가 새겨져 있다. 이 시 역시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눈물’이라는 아버님의 대표적 시중의 하나이다. 이 시가 쓰여진 배경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일제말기 절필하시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그토록 원하시던 시혼을 다시 불태우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하신 아버지는 넷째 아들을 선물로 받으셨는데 그 애지중지하시던 아들을 갑자기 잃게 되었고 이때 입은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시면서 지으신 시가 바로 ‘눈물’이라는 시이다.
“더러는/옥토에 떨어 지는 작은 생명이고저.../흠도 티도,/금가지 않은/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중략)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이후 어머니는 다시 아이를 가지셨으나 아직 아픔이 채가시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처음엔 원치 않으셨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가을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세워진 시비에는 ‘가을의 기도’가 아닌 ‘눈물’이라는 시가 또 아버님의 묘비에도 같은 시가 새겨져 있다.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하다가 아버님이 돌아 가시기 직전 남기신 제목이 없는 시를 다시 읽어 보게 되었다. 이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게 끝난다. “主여 이 시간엔 잃게 하소서/요란한 말들을 잃게 하소서/그리고 /나의 눈물 소리와/나의 눈물 소리만이 떨어져/이 빈 시간을/채우게 하소서.”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인생에 대한 깊은 철학적인 고뇌와 함께 신에 대한 회의에까지 빠져 ‘절대고독’의 심연에까지 이르렀으나 돌아가시기 3년 전에 한번 쓰러져 죽음에 이르는 경험을 하셨다. 이후에는 결국 나의 눈물 소리만이 이 빈 시간을 채우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면서 겸허하게 자신을 다시 하나님께 맡기셨던 시인이자 한사람의 기독인으로서 당신이 경험했던 소중한 삶의 메시지가 이 시를 읽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 졌으면 하는 염원을 담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