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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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로 주고 말로 받다

2013-11-0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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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청원 내과 전문의

하루 일과 시작 전 이른 아침이다. 오피스 주위로 청소하는 인기척과 모터 돌아가는 소음이 들린다. 어김없이 창 너머로는 30년간을 빠짐없이 매주 청소를 해주는 미스터 L의 소년 같이 맑은 얼굴이 보인다.

30년 전 가랑비가 머리에 살짝 얹혀 지는 그런 토요일 오후였다. 외출했다가 집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에는 쭈그리고 앉아 정원을 가꾸고 있는 미스터 L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아니 오전에 퇴원시켰는데 어떻게 이렇게 나타나서 정원을 가꾸고 있어요? 또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놀라 연달아 묻는 내게 그는 수줍은 듯 대답했다. “치료해 주신 것에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은데, 현재 제가 가지고 있는 거라곤 정원 가꾸는 기술뿐이어서요” 그래서 퇴원즉시 주소를 알아내어 이곳으로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 집 정원사가 되었고, 어느새 가족같이, 정다운 이웃같이, 아니 친구같이 되었다. 우리 오피스나 집에 일손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서슴없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말없이 매주 오피스에 나타나 꽃밭 손질도 파킹랏 청소도 무료로 말끔히 해준지도 30년이 지났다.

그는 교통사고로 뇌에 피가 많이 고여 응급수술을 한 후 중환자실에 2주간 있었던 환자였다. 당시 의료보험이 없어 난감해 하던 그에게 의사 진찰비를 받지 않고 진료 해준 게 이런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성실하고 정직한 성격의 그는 십만 달러가 넘는 병원비를 7년에 걸쳐 땀 흘려 번 돈으로 매달 꼬박꼬박 갚은 그런 사람이다. 나로서는 조그마한 호의를 오랜 세월의 큰 소중한 선물로 보상받은 것이니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옛 속담을 체험한 셈이다.

내과의사로 많은 환자를 접하다 보면 이런저런 인간관계에 얽혀 기쁨과 보람 못지않게 애로와 실망도 경험하게 된다. 그런 중에서 이런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힘든 일들은 다 씻겨 나간다. 상자 속에 감추어졌던 빛나는 보석을 먼저 뚜껑을 열어 찾아낸 기쁨, 인간관계의 훈훈함에 마음 따뜻해지는 감동이 주는 치유의 힘이다.

얼마 전, 오래 타던 늙은 밴(van) 차를 팔려고 광고를 냈다. 그가 자기도 밴이 필요하다며 사겠다고 했다. 거저 가져가라는 나의 제의에 그는 펄쩍 뛰었다. 꼭 돈을 지불하고 가져가겠다는 그에게 나는 한참 설명했고 결국 “인간관계, 아니 우리 사이에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돈이란 인간에게는 휴대용 행복일 뿐이고, 당신이 오늘까지 우리에게 베풀고 있는 수고의 가치에 비하면 돈은 아무 의미가 없다”라고 단호한 말로 설득한 후에야 밴을 ‘강제로’ 넘겨줄 수 있었다.

일주일 후, 의논도 없이 통보도 없이 20년 넘은 우리 집 늙은 잔디가 싱싱한 푸른 잔디밭으로 바뀌었다. 그가 낡은 잔디를 전부 걷어 버리고 새 잔디로 깔아 준 것이다. 밴을 거저 준 ‘마음’에 대한 자기 ‘마음의 대답’이라고 그는 여전히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또 한 번 되로 주고 말로 받은 느낌이었다.

오늘도 오피스 창을 통해 땀 흘려 청소하는 그의 순수한 얼굴을 바라보며 앞으로 30년 후를 혼자 상상한다. 그땐 우리가 하늘 높은 곳, 꽃들이 만발한 푸른 초원에서 만나 볼 수 있게 될까, 풀을 깎을 필요도 없고, 병든 사람도 없는, 그래서 일손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곳에서 흰 거품 가득한 맥주를 앞에 놓고 마주하고 싶은데…아무 말 하지 않아도 싱싱한 풀 냄새, 향기로운 꽃 냄새를 발할 그를 난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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