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이어서 그런지 승객이 별로 없다. 한 후줄근한 차림의 사내가 낮술에라도 취했는지 혼자 횡설수설이다. 그 모양새가 역겨워 보인다. 그러다가 ‘정치가 저 모양이니 어쩌니…’하는 말을 내뱉는다.
사람들은 못 들은 척 한다. 순간 뒤 좌석에 있던 한 중년여인이 벌떡 일어선다. “세월이 어떤 세월인데 제 멋대로 떠들어! 운전사 버스 좀 세워요. 저 사람 혼 좀 나야해.” 운전사는 무시하고 그냥 차를 몬다. 그러다가 여인의 서슬에 마침내 차를 세운다. 그제야 사내는 술이 깼는지 후다닥 차문을 열고 도망친다.
1979년 10월26일 얼마 앞둔 시점. 서울의 한 시내버스에서 일어난 극히 작은 에피소드다. 짓누르는 공포. 그 가운데 냉소와 무기력, 체념 같은 것이 만연했었다. 그러다가 맞은 10월27일. 새벽방송을 통해 전해진 뉴스는 ‘대통령 유고’였다.
일시에 해방감 같은 것이 감돌았다. 한 쪽에서는 만세소리도 들렸다. 김문수 경기지사는 당시 호외를 받아들고 너무 기뻤다고 했다. 유신정권이 마침내 막을 내린 것이다.
독재자란 무엇인가.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전체주의 체제 독재자와 권위주의 형 독재자는 구분해야한다. 권위주의 형 독재체제는 민주주의로의 전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미국의 보수진영에서 나온 주장으로, 그 선봉에 선 인물은 진 커크패트릭이었다.
‘인권’이란 일률적 잣대로 추진해나간다. 카터의 해외정책이다. 그 정책이 너무 ‘나이브’하다는 공격에 그 이론이 원용된 것이다. 그러면 이중 잣대를 적용하라는 것이냐. 진보세력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한 세대 후 커크패트릭의 주장은 옳았음이 입증됐다. 많은 우파 권위주의 형 독재체제는 민주체제로 바뀌었다. 반면 공산주의로 대변되는 전체주의 독재체제는 붕괴상황을 맞은 것이다.
“민주주의자라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독재자라고 모두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싱크탱크 스트랫포의 로버트 카플란의 주장이다.
공포가 통치의 기반이다. 선거로 선출되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선정을 펼쳤다. 아프리카 수준의 최악의 빈곤국에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군(群)에 들었다. 싱가포르의 리관유 총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를 단순히 독재자라고만 비난 할 수 있을까. 카플란이 던진 질문이다.
반면 파키스탄의 나와즈 샤리프와 그의 라이벌이었던 베나자르 부토는 차례로 선거를 통해 정권을 쥐었다. 그러나 전적으로 부패했다. 악정(惡政)의 표본이 된 것이다. 분명 민주정권이다. 그렇지만 한 마디로 반(反)자유주의적인 정치로 일관한 것이다.
이런 지적과 함께 카플란은 나름으로 독재자의 패턴을 정리했다. 아랍 형 독재자가 그 한 유형으로 사담 후세인에서 현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한 마디로 무지막지한 탄압체제다. 이 아랍 형 독재자들은 하나 같이 국가를 파탄상황으로 몰아갔다.
또 다른 유형은 아시아 형 독재자다. 싱가포르의 리관유가 그 전형이다. 독재정치를 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민주화의 초석을 마련했다. 중산층 육성을 통해. 이런 점에서 아랍 형 독재자와 차별된다는 것이 카플란의 지적이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후하다. 분명히 독재자다. 그러나 다른 한 면 자유주의자로도 분류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산층 육성을 통해 민주화 토대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인용이 길어진 건 다름이 아니다. 벌써 34년이 지났나. 유신시대가 극단의 희비 속에 막을 내린 것이. 그 유신시대에 대한 논란이 뒤늦게 새삼 재개돼서다. 그 발단은 박정희 대통령 추도식이다.
“간첩이 날뛰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유신시대가 더 좋았다.” “한국에는 독재가 필요하다.” 박정희 대통령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나온 발언들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일단은 살아 있는 권력을 염두에 둔 아부성의 발언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새삼스러운 현상이 박정희 추모열기이고 일부 지역에서는 그가 하룻밤 묵은 곳까지 ‘성역화’되는 판이니까.
박정희 시대에 대한 아전인수 격 해석에서 온 착각증세란 해설도 가능하지 않을까.
무조건 폄하하려고 든다. 경제적 발전은 시대의 필연적 결과일 뿐 그의 공으로 볼 수 없다. 박정희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좌절시킨 장본인에 불과하다. 좌파의 시각이자 평가다.
박정희 지지 세력도 심한 착시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박정희 미화가 지나쳐 신격화 움직임마저 보인다. 그러면서 그 숨 막히던 개발독재 정책이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최선의 정책인 것 같은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를 극복하지 못한 우파, 종북세력의 볼모가 된 좌파. 대한민국 정치의 비극은 여기서 찾아지는 것이 아닐까’- 누가 한 말이었던가.
좌파가 좌파를 비판하고 우파가 우파의 잘못을 지적하는 정치는 언제쯤에나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