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의 소리

2013-10-3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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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용진 시인

가을이 되면서 문 앞 포플러 나무들이 유난히 더 커 보이고 바람을 모아 오는 소리가 맑게 들린다. 봄의 꽃 소식이 남쪽에서 바닷바람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는 것에 비하여, 가을의 엽신(葉信)들은 하늘 가까운 높은 산으로 부터 붉고 누렇게 물들기 시작하여 마을로 내려와 벚나무 북나무 옻나무 그리고 감나무에 불을 붙인다.

조석으로 청량한 바람이 불면서 더위와 흙먼지 낀 낮은 구름은 자리를 피하고 어두운 산그늘이 말끔히 걷히어 비 개인 후 산의 신선미가 흐르듯 한여름 멀리 섰던 산들이 집주위로 다가와 둘러선 듯 착각을 하게 한다.

산속에 사는 사람은 누구 보다도 먼저 싱그러운 가을을영접하게 된다. 우아하고 산뜻한 봄의 정취, 무성하고 강인하며 선이 굵은 여름의 풍만, 눈 속에 덮여서 새로운 생명의 꿈을 잉태하는 겨울의 인내와 고적에 비하면, 가을은 만고풍상 갖은 여정을 보내고 조용히 황혼을 맞이하는 노인처럼 은은히 풍겨나는 덕의 향기와 원숙한 열매를 대하는 포만감과, 낙엽의 구수한 내음에 취하는 멀고 깊은 여유가 있다. 봄의 꽃 내음의 정경이 여인의 계절에 비유되는데 비하여 가을의 타는 듯 붉은 단풍과 터질 듯 알알이 영근 백과들은 남성의 계절에 견준다.


가을은 머언 길을 떠난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사립문 앞을 청결히 하며, 동구 밖 고목나무 밑을 뒹구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의미를 묻고 허무를 노래하며 죽음을 생각하는 애상의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 계곡엔 기인 여름의 따가운 더위를 견뎌낸 인내와, 지루한 장마 속에서 풀벌레들의 짜증을 들어 준 여유와, 맺힌 열매를 성숙시키기 위하여 힘겹게 늘어진 가지를 버티고 선 나무들의 강인한 의지가 엉켜있음을 본다.

보는 이도 별로 없고 가꾸는 손길도 없는 외진 산록을 지나다 윤택하게 익은 산과를 대하면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다른 한편으론 왠지 안쓰럽고 가엾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청량한 가을바람이 가슴을 향하여 조용히 흘러들면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말없이 성숙하는 과일들을 대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운 질서와 신의 위대한 섭리와 이들을 바라보고 감사할 줄 아는 인간임을 기쁘게 생각하게 된다.

산을 떠나 거리로 접어들면, 지조를 버리고 명성을 찾아 길 잃은 개처럼 헤매며, 나올 곳 못나올 곳 가릴 것 없이 얼굴을 나타내면서 상황에 따라 편리하고 약삭빠르게 변신하는 인간들의 약삭빠른 모습들이, 무언의 섭리 속에 조용히 길들여질 줄 아는 자연에 비하면 너무나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닌 생각만이 우국의 길이라고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만이 민주와 통일에 일가견이 있다고 과신하고 있는 것은 아닐 런지, 수신이나 제가도 못한 처지에 치국 운운하는 우를 범하는 위인은 아닌가? 강자 앞에는 비굴하게 기어들고, 약자들은 짓밟고 올라서려고 하지는 아니하는지, 마음 깊이 생각해 봐야할 이 가을이다 알곡을 가득히 싣고 가는 수레는 소리가 없고 빈 수레만이 요란한 것이 가을 거리의 정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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