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침을 열며]입증책임이부르는광기

2013-10-0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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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서초동의 한 법정. 원고석에 앉아 있는 사람이 침까지 튀기며 무언가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듣고 있던 재판장은 원고 주장이 5분을 넘기자 원고를 제지하고 피고에게 답변을 할 것을 명한다. 피고석에 앉아 듣고만 있던 이가 간단하게 한마디 한다.“원고가 한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러자 재판장은“원고, 증거가 있습니까?”라고 하고 원고는 자기가 왜 억울한지, 피고가 왜 나쁜 사람인지에 대해 5분 넘게 열변을 토하다 또다시 제지를 받는다.

피고를 철썩같이 믿었던 원고는 거액을 빌려 주고도 차용증 한 장 받아 놓지 않았는데 피고가‘나는 돈을 빌린 적이 없고 투자를 받았을 뿐인데 사업이 망했으니 돈을 돌려줄 수 없다’며 얼굴을 싹 바꾸었고, 이를 본 원고가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으로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연은 딱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원고가 증거를 대지 못하면 원고는 재판에서 패소하고 상대방의 소송비용까지 물어 줘야 하는 신세가 된다. 원고의 애끓는 호소만으로는 민사소송의 원칙인 입증책임의 벽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입증책임의 대원칙은 주장하는 자가 입증하라는 것이고 또한 증명하지 못한 자가 패소의 위험을 부담하라는 것이다. 실체적 진실은 신만이 아는 것이니 신이 아닌 재판관은 증거를 기준으로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그나마 법관 마음대로 재판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역사적 깨달음을 통해 정착된 원칙이다.


일반적인 민사소송에서는 피고가 아니라 원고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입증을 할 책임을 진다. 민사 재판정에서 피고가 원고의 주장을 느긋하게 바라본 후 “증거를 대라”는 한마디만 해도 피고 승소판결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입증책임의 벽 뒤에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형사재판에서는 피고인의 유죄를 주장하는 검사가 입증책임을 진다. 입증할 증거를 미리 확보하기 위한 절차가 바로 수사절차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법관이 유죄의 확신에 이르지 못했을 때 무죄선고가 내려진다. (여기서의 무죄(無罪)는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유죄라는 증거가 없다’는 뜻에 불과하다.)이처럼 입증책임은 소송의 승패를 가르고 유죄와 무죄를 결정하기 때문에 소송당사자는 죽기살기로 입증을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증거를 모으는 광기가 발현되기도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녀 사건 역시 입증책임의 광기가 보이는 사건이다. 신문사나 전임 총장이나 자신의 존립이 걸린 문제이므로 입증을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려 할 것이다. 또 채 전 총장의 형사고소로 수사가 개시되면 입증책임을 지는 검사도 업무라는 이름으로 입증책임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진짜 주인공이 있다. 바로 임 여인의 아들이다. 강제수사로 유전자검사를 한 결과 채 전 총장의 아이로 확인됐다고 치자. 자신이 아들이 아니라고 만천하에 선언한 아버지를 봐야 하는 아이가 받을 충격은 어떠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또 채 전 총장의 아이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면 어떨까. 평범하게 살던 아이가 졸지에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될 것이고 그 상처는 누가 치료해 줄 것인가 말이다.

아이도 아이의 어머니도 아버지를 찾아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아이의 아버지를 확인할 것을 강요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의 정당성 확보에 눈이 먼 제3자들이 아이와 어머니를 제쳐 두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입증을 해야겠다며 외쳐 대는 모습은 몇 번을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광기이자, 아이와 어머니에게 평생 치유될 수 없는 심각한 폭력이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광기 어린 폭력은 중단되어야 한다.


<장진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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