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올 가을에는

2013-09-2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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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 스님 전 텍사스 문인협회장

학교 운동장엔 만국기가 펄럭이고 플라타나스 나뭇가지에 매어달린 스피커에서는 신나는 행진곡이 흘러나오고 까만 빤쓰에 세로로 두 줄 그어진 운동복을 입고 덩치 큰 아이들에 얹혀 기마전을 끝내고 보무도 당당하게 종이로 예쁘게 감긴 개선문을 나서면 할머니 보따리에선 삶은 고구마랑 옥수수가, 이가 모두 빠진 할머니 웃음소리와 함께 반갑게 맞이하던 추석 다음날의 초등학교 운동회, 그날도 오늘처럼 하늘이 높고 푸르렀다.

낙엽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뒹구는 오후의 교정 벤치에서 은행잎을 주워 새로 산 모나미 볼펜으로 희야! 순아! 라고 알지도 못하는 여자아이들의 이름 위에 하트 모양을 그리고 용어로 LOVE라고 썼다가 체육 선생님한테 들킬까봐 찢어버린 중학시절, 그날도 익은 벼 이삭에 앉았던 메뚜기가 날아간 하늘이 오늘처럼 맑고 파아랐었다.

설악산 신흥사에 심부름 다녀오던 날, 예쁜 등산복에 파아란 배낭을 메고 빨간 등산 스타킹을 신은 머리 긴 여학생들의 모습과 회색 바랑을 짊어진, 빡빡머리 도반스님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날, 길가의 코스모스는 왜 그렇게 흐드러지게 피고 파란 하늘엔 왠 잠자리가 그리도 많던지.


하늘이 유난히 높고 파아란 날 밤이면 영락없이 둥근달이 떠 올랐었다. 영글지 못한 몸둥아리, 거산에 던져진 어린 시절의 고독, 그 속에서 울부짓던 젊음의 나날들, 둥그렇게 뜬 하얀 달을 향해 수없는 돌팔매질을 하듯, 화선지 위에 그림을 그리고 대상도 없는 낙서를 하다가 목탁채가 부서져라 두들기던 밤들….

이런 날들이 하얀 원고지를 메꾸어 시가 되었다. 부처님을 끌어안고 뭄부림 치듯 원고지를 끌어안고 씨름을 하다보면 하얗게 금을 긋는 제트기가 지나가는 하늘처럼, 조용한 평화가 찾아오고 나는 가부좌를 틀고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지나가는 달력의 날짜는 달라도 이곳 미국에서의 추석도 고국의 하늘처럼 높고 푸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미국 교포들은 너무나 바쁜 이민생활 속에서 젊은 시절은 후딱 지나가 버리고 삼단 같던 머리가 반백이 다 되도록, 떨어지는 낙엽을 한번쯤 음미하며 추억을 더듬던 기억이 있을까.

둥근달이 떠오르는 하늘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살아온 서글픈 삶속에서 친지한테 편지 한 장 쓰지 못하는 신세가 돼 버렸지만 아직 꿈 많던 학창시절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문학소년 소녀의 꿈을 기억해 낼 수 있다면 이제는 느긋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자.

하늘은 저렇게 파랗고 아직 남은 날들이 많지 않은가. 농익은 수밀도 같은, 아니면 오래 잊혀졌다가 책갈피 속에서 찾아낸 첫 사랑 애인의 사진 같은 그런 신선한 낱말을 찾아내 김소월이 되고 서정주가 되어, 고갈된 마음을 적셔주는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 같은 시를 지어보고 싶지 않은가. 동포들의 마음을 열어 훈훈한 바람을 넣어주는 그런 가슴 따뜻한 시인을 올 가을에는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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