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때와 장소

2013-09-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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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바 오 사진작가

지난 노동절 연휴 비숍으로 단체여행을 다녀왔다. 가깝게 지내는 몇몇 부부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우정을 돈독히 하자는 마음으로 단체여행에 합류했다. 비숍은 가을이 되면 온통 산 전체가 노랑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애스핀 단풍이 깊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흔들릴 때면 산은 더욱 화려하게 빛난다.

단체 일정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호텔 바로 옆 개울가에 자리를 잡았다. 운치 있는 곳에 우리만의 아지트를 마련한 후 가지고 온 음식과 와인을 테이블 위에 가득 차려 놓고 파티를 시작했다.

한창 신이 나서 건배를 외치고 있는데 단체여행에 함께 온 후배들 한 무리가 나타났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은 우리가 있는 곳에 와서 합석을 했다. 인사 한 마디 없이 자리에 와서 앉더니 옆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었다.


조용히 우리끼리의 시간을 만끽하려던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저녁 시간을 오붓하게 보내려던 계획은 틀어지고, 나는 호텔 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 모임에 합석을 해서 좋을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 데 그들은 그걸 분별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른 장소, 다른 때 만났으면 재미있게 어울렸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리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다. 지난 7월 말 팜 스프링스에서 있었던 한국가수 S씨의 공연이다. 그는 한국 가요계에서 꽤 실력 있는 가수이자 작곡가로도 인정받는 연예인이다. 나는 골프도 치고 그의 노래도 즐길 겸 친구들과 팜 스프링스로 갔다.

평소 팜 스프링스를 보면 ‘지상 천국’이란 생각이 든다. 허허벌판 사막인 이곳에 세계적 골프 프로들이 디자인한 골프코스가 여기 저기 끝없이 펼쳐져 있다. 세계 각국의 부호들은 이곳에 별장을 지어놓고 가을과 겨울을 한갓지게 즐기곤 한다.

공연시간에 맞춰 공연장소인 카지노 호텔에 가니 객석이 야구장만큼이나 크게 느껴졌다. 카지노에서 갬블을 즐기던 사람들, 골프치고 오는 사람들 혹은 LA에서 두세 시간 운전하여 도착하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 들었다. 그러나 공연장이 워낙 크니까 객석은 많이 비었고 쇼는 힘이 없었다.

때와 장소를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팜 스프링스는 4월 이후부터 9월 이전까지는 거의 죽은 도시나 다름없다. 사람들이 철새처럼 떠났다가 뜨거운 여름이 지나야 돌아오는 곳이다. 햇볕 내리쪼이는 7월 마지막 주말, 그곳에서 쇼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마침 그날은 다저스의 류현진이 등판하는 날이기도 했다.

더욱 안 맞은 것은 그 가수의 노래와 공연장소였다. 그의 노래는 조용히 눈 감고 감상하기에 좋은 곡들이다. 반면 사람들이 호텔 카지노의 쇼에 오면서 기대하는 것은 흥겹게 즐기는 것이다. 때와 장소가 맞지 않으면 한사람 초라하게 되는 건 잠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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