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달팽이의 스피드

2013-09-1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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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여춘 시애틀지사 고문

요즘 등산객들은 고산준령의 경치가 아닌 턱밑 발뿌리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흉측하게 큰 달팽이들이 등산로에 널려 있다. 뱀처럼 징그러운 게 요지부동이어서 한 눈 팔다가는 밟기 십상이다. 등산화에 깔려 뭉그러진 달팽이는 새들도 먹지 않는다. 시속이 고작 7미터 정도인 주제에 왜 안전한 풀섶에서 트래픽 심한 등산로로 기어 나오는지 모르겠다.

속도와 담쌓고 사는 달팽이와 달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스피드 지향적이다. 달팽이보다 수천 배 빠른 속도로(아마도 수없이 많은 달팽이를 밟아 뭉개며) 두 달간 등산로를 치달은 끝에 서부 3개주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2,665마일 거리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을 최단시간에 주파한 기록을 세운 두 남녀 이야기가 지난주 전국 주요 신문에 보도됐다.

LA 인근 산타모니카 초급대학의 육상코치인 조쉬 가렛(30)은 지난 6월10일 멕시코 국경을 출발해 8월6일 캐나다 국경에 도착했다. 59일 8시간14분만이었다. 장거리 등산가 스캇 윌리엄슨이 2011년 세운 64일 11시간19분을 5일 이상 단축한 신기록이다. 출발 3일 만에 화씨 100도의 무더위 속에 탈진해 쓰러진 후 24시간을 쉬고도 이뤄낸 대기록이다.


가렛은 아침 6시부터 하루 평균 45마일을 걸었다. 평지에선 자정을 넘겨 70마일을 걸은 적도 있다. 샌디에이고 남쪽 캄포를 출발해 빅베어, 레이크 타호, Mt. 샤스타, 크레이터 레이크, Mt. 후드, Mt. 아담스, 스노퀄미 패스, 스티븐스 패스, 노스 캐스케이드 국립공원 등 서부 3개주의 7개 국립공원과 25개 국유림을 통과한 후 캐나다 국경에 골인했다.

한국에도 비슷한 사람이 많아졌다. 지난달 해남(전남)에서 고성(강원)까지 622km를 6박7일간 달린 ‘울트라 마라톤’에 보통사람 81명이 참가했다. 식용동물 사육업자들의 잔혹상을 고발하겠다는 가렛과 달리 ‘울트라 마라톤’ 참가자들은 명분도, 깰만한 기록도 없이 본인들의 스피드를 즐기며 무작정 달렸단다.

꼭 5년 전 믿기 어려운 스피드 하이킹 기록이 나왔었다. 레이니어 마운틴 정상에 올랐다 내려오는데 4시간46분29초 걸린 리암 오설리반(당시 29세)의 기록이다. 레이니어 등반 전문 안내자인 그는 해발 10,000피트 지점의 베이스캠프(캠프 뮈어)까지 운동화를 신고 1시간 24분31초만에 달려 올라갔다. 나는 7년 전 그곳에 가는데 5시간 이상 걸렸었다.

우연이지만 스피드 관련 뉴스들이 최근 잇달아 보도됐다. LA-샌프란시스코 구간을 30분 내에 주파하는 ‘하이퍼 루프’ 계획도 공개됐다. 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는 현재 비행기로 1시간 15분, 자동차(I-5)로 5시간 30분 소요된다.

육상의 ‘단거리 황제’ 로 불리는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는 지난 18일 모스크바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00, 200 및 400미터 계주에서 3관왕이 됐다. 그의 100m 최고기록은 베를린대회에서 세운 9초58이다. 1초에 평균 10m이상을 달린다는 계산이다. 초속 0.2cm인 달팽이에 비하면 가히 광속이다.

하지만 볼트도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지구 스피드에 비하면 달팽이에 불과하다. 둘레가 4만75km인 지구는 시간당 167만m, 초당 464m씩 자전한다. 한번 돌때마다 인간 수명이 24시간 짧아진다. 무서운 속도다. 볼트도, 가렛도 자기네 수명의 스피드를 따라잡지 못한다. 120세를 산 유대인의 영웅 모세도 인간 수명이 “날아간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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