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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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번 먹자

2013-09-0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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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교 시인

우리가 친구들을 만날 때 제일 많이 쓰는 말이 밥 한번 먹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친지나 친구나 우리들은 생각이 다 같을 수가 없어서 그 사이가 뜸해지는 경우도 있고 괜히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마음을 다쳐서 한동안 으르렁 거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좀 후회도 생기고, 이게 아닌데 하며 서로의 마음을 풀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때 전화를 한 사람이 우리 만나서 밥 한번 먹자라고 말하게 된다.

이 정도면 벌써 다 마음이 풀어진 상태다. 만나서 맛있는 밥 한 끼를 먹고, 별로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아도 금방 기분이 좋아지고 옛날의 관계가 회복된다. 이렇듯 음식을 가운데 두고 나누는 것은 음식 뿐 아니라 서로의 정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삼식이, 이식이, 일식이, 영식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하루 세끼 밥을 차려주는 남편은 삼식이 새끼, 두 번은 이식이 놈, 한번은 일식씨, 한 번도 안 먹는 남편은 영식님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크게 웃은 일이 있다.


우리 남편은 행인지 불행인지 영식님에 속한다. 우리들은 늙어가며 함께 밥을 먹는 일은 극히 드물다. 남편은 양식을, 나는 한식을 좋아하기 때문에 각자 스스로가 해먹으며 밥 먹는 시간도 다르다. 나는 일찍 먹고 남편은 느즈막하게 먹는다.

젊어서 나는 남편이 다른 남편들처럼 한식을 잘 먹었으면 참 좋겠다고 부러워한 적이 있다. 내 친구들의 남편은 김치찌개도 심지어 냄새나는 청국장까지 먹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런 점에서 늘 쓸쓸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요리를 많이 했다. 주로 저녁에는 양식을 많이 만들었지만 큰 아들이 집에 있을 때는 그 애를 위해 늘 김치찌개를 따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다 자라서 집을 떠나고 빈 둥지가 된다는 것은 외롭지만 편리한 점도 있다. 그야말로 밥 당번에서 좀 해방이 됐나 싶어도 아직 남편은 건재하고 은퇴를 해서 집밖을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문제다. 주위에 그런 남편들이 더러 있는데 그야말로 마누라들이 제일 고생이다. 어디 외출을 하고도 밥시간이 되면 그들은 안절부절이다. 남편들 중에는 시리얼 하나 자신이 갖다가 먹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장수하는 사람들일수록 많이 움직인다고 한다. 그리스의 한 섬에 사는 장수촌 사람들에게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보통 양치기가 직업이었기 때문에 많이 걷고 좋은 치즈를 먹고 늘 주위에 친지들이 많아서 행복했다고 대답했다.

나는 지금도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꼭 해 먹는다. 어떤 친구들은 귀찮다고 안 해 먹지만 아직 좋아하는 이웃이나 친구들을 불러다 음식을 해 먹이는 일도 아직은 그런대로 괜찮다. 이런 일들이 귀찮아 지면 그땐 정말 내가 늙은 것일 게다.

늙어 갈수록 주위에 밥 한번 먹자 하는 친구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건 밥도 밥이지만 서로 정과 사랑을 나누려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치매는 영혼을 잃어가는 병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누구나 다 병 중에서도 제일 무서워한다. “내일 어때? 밥 한번 먹을래?” 그런 전화가 많이 올수록 덜 외롭고 사는 맛이 나고 치매 같은 병에서도 멀어질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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