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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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썩지 않으면 잎이 핀다

2013-08-3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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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욱 뉴욕지사 객원논설위원

아파트 길가 가로수 한 그루가 지난 번 샌디 폭풍으로 꺾여 버렸다. 뿌리에서 약 2미터 가량의 기둥 외엔 모든 가지가 다 날아가 버리고 앙상하게 나무 기둥만 서 있었다. 나무 기둥을 지나칠 때마다 보기 싫은, 죽은 나무를 캐내지 않고 왜 내버려 두나 하며 의아해했다. 송두리째 나무를 뽑아 버리면 될 텐데 돈이 들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샌디가 지난 가을에 왔으니 한 겨울이 지나고 봄도 지나 여름이 왔다. 나무기둥은 흉물단지처럼 늘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찡그리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썩은 송장 같은 나무 둥지 꼭대기에서 조그맣게 잎이 나기 시작했다. 작은 잎이 한 잎 두 잎 피기 시작하더니 가지를 치는 게 아닌가. 도대체 어디서 이런 기적이 일어나나.

나무의 뿌리를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의 세계와 비교해 본다. 뿌리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 한, 나무가 죽지 않고 잎을 피우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마음과 정신이 온전하고 영혼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뿌리가 건강하고 든든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시들시들 말라 비틀어져가는 나무와 비유될 수 있다.


산에서 늘 보는 광경이 있다. 큰 나무들이 폭풍에 뿌리째 뽑혀 황량하게 쓰러져 있는 모습들이다. 하나같은 현상은, 쓰러진 나무의 큰 뿌리와 잔뿌리들이 깊이 뻗어있지를 못하고 모두 옆으로 퍼져 뻗어 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건 뿌리가 뽑힌 그 웅덩이엔 큰 바위나 돌들이 널려 있어서 뿌리를 땅 속으로 깊이 뻗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현상이다.

그럼 어떤 사람이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사람일까. 무심(無心)과 중도(中道)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무심이란 마음 없음이 아니고 욕심 없음을 나타내는 마음의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산 속의 작은 암자에서 평생 홀로 살며 무소유의 삶을 보여 준 법정스님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사람 아닐까.

또 어떤 사람이 영혼이 맑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악이 소동치는 이 세상에서 평화스런 마음을 갖고 살아가게 해주는 암투병중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이해인 수녀 같은 사람이 아닐까. 2010년, 암의 고통가운데서도 출간한 ‘희망은 깨어있네’란 책 제목 자체가 희망으로 다가온다.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두 아들을 처형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여 자신의 양자로 삼고 소록도 나병환자 수용소에서 그들의 손발이 되어 주던 손양원 목사. 교장으로 초청을 받았으나 나환자들의 돌봄을 마다할 수 없다고 거절한 목사. 6.25의 희생으로 순교(42세)한 목사. 이런 사람이 영혼이 깊고 맑은,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사람이 아닐까.

부러져 버린 가로수 한 그루의 생명이 뿌리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 잎을 무성히 피우며 소망을 안겨주고 있다. 영혼과 정신, 마음이 깨끗하고 맑은 사람은 뿌리가 깊어 역경이 와도 이겨나갈 사람들이다. 법정스님, 이해인 수녀, 손양원 목사의 무소유, 희망, 사랑의 뿌리가 지금도 세상을 밝게 해준다. 뿌리가 썩지 않으면 언젠가 잎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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