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안개의 천국

2013-08-24 (토)
크게 작게

▶ 김희봉 수필가

그대는 샌프란시스코 도심으로 스미는 안개의 모습을 본 일이 있는가? 저녁 무렵, 트윈 픽 등성이를 넘어오는 안개 사단의 진군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금문교의 두 첨탑이 거대한 안개의 베일에 휘감겨 구름기둥처럼 하늘을 떠가는 광경을 목도한 일이 있는가?혹, 쏘솔리또 언덕을 폭포처럼 쏟아지는 안개비에 흠뻑 젖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버클리 산허리에서 샌프란시스코만으로 잠입하는 안개 띠의 서행을 주시한 적이 있는가? 신데렐라 같이 태가 고운 이 도시는 급류처럼 빠르게, 어떤 땐 운무처럼 느리게 흐르는 안개의 강속에 몸을 담근 채 깊은 꿈을 꾸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8월은 안개의 천국이다. 온 대륙이 한 여름의 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을 때, 이 태평양변의 항구는 우윳빛 안개 속에 침잠한다. “내가 보낸 가장 추운 겨울은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이었다”라고 고백한 마크 트웨인의 푸념은 이젠 꽤 익숙한 전설이 되었다.

태평양 심해에서 올라온 찬 바닷물이 더운 공기와 만나 잉태된 샌프란시스코의 안개는 비단결같이 부드러운가 하면 빙하처럼 싸늘하다. 물과 증기,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이중성이 이렇게 안개의 본질이 됐는지도 모른다. 연인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도시를 어루만지다가도 팜므파탈처럼 차디찬 입김을 냉혹하게 뿌린다.


올 여름, 나는 남도 땅 강진엘 내려갔었다. 강진은 왠지 내게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김승옥이 소설에서 묘사한 안개는 인간들의 허무의식을 드러내는 상징이라고 한다. 그의 안개는 인간 내부의 끈적끈적한 일탈과 욕정의 원초적 세계를 은유하고, 무진 역시 안개가 자욱해 모든 것이 불투명한 공간으로 현대인이 처한 위치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안개라는 메타포를 통해 그것의 이중성을 서울과 고향, 과거와 현재, 순수와 타락, 인간적인 후배와 속물 친구의 대비로 묘사한 듯 보인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의 안개는 무진의 여귀 같은 허무나 애매한 이중성과는 다르다. 오히려 모호함을 불사르고 확연히 피어오르는 예술혼이나 활기찬 낭만의 화신처럼 보인다. 그 증좌가 안개 속에 휘감겨 하늘을 날아오르는 금문교의 자태일 것이다. 붉은 금문교각 사이로 안개의 강이 흘러오면 첨탑 위 밤하늘 별들은 오히려 더 명멸하고, 사람들은 가슴을 열고 안개와 살을 비빈 채 함께 떨고, 흐느끼고, 웃고, 노래한다.

꿈꾸는 자의 설레는 가슴만이 이 도시의 안개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안개 속에서 밤을 지새 본 사람만이 마법의 성으로 빨려드는 강한 에너지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으리라. 납힐 언덕에서 보름달을 따려고 전차에서 내려 본 사람만이 운무 속에서 과거와 우윳빛 미래를 함께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대가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우선 창문너머 먼발치에서 안개를 바라볼 일이다. 가장 아껴둔 시를 암송하며 음미할 일이다. 둥근 잔에 붉은 포도주를 가득 채운 채 안개가 급류의 강을 만들고, 혹은 천천히 성을 쌓는 모습을 오래 주시할 일이다. 그래도 못내 그리우면 금문교각에서 안개의 강에 발을 담그고 하늘 틈새로 명멸하는 별들을 올려다볼 일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