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생 이모작

2013-07-0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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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성 가정상담소 프로그램 디렉터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난 2011년 2월 첫날에 쓴 일기를 들여다보았다. 퇴직 후에 새로 갖게 된 직장으로 출근하는 날이어서 기대와 흥분이 컸던 지 시작하는 글귀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일기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래, 인생 이모작이라고 하더니 내가 정말 인생 이모작을 시작하는 그 첫날 출발선에 서있구나. 지금까지 주변에서 받아왔던 고마움을 이제부터는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 그래, 이웃을 위한 봉사, 그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새로운 일이요 내 삶의 화두로 삼아야 할 주제가 아닌가? 좀 늦은 감은 있으나 이제부터라도 이웃에게 봉사하는 뜻있는 삶을 살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워싱턴 가정상담소로 출근하는 첫날의 소감과 각오를 썼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떠나야 할 시간이 되어 뒤를 돌아보니 29개월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미국에서 잠시 학교에 다니면서 살기는 했지만 평생을 한국에서 나고 살아온 내게 미국은 아직도 낯설고 외로운 곳이었다. 그런 외국 땅에서 시작했던 인생 이모작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어려운 것이 오히려 당연하였는지도 모른다.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부터 한국에서 누리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내려놓고 잊으라”던 친구의 말을 되새기면서 어려운 순간을 이겨내려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가며 버티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것은 ‘일’이 아니라 ‘과거의 나’를 잊는 일과 ‘마음을 다스리는 일’ 이었다.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안정을 찾아간 것은 한인 커뮤니티를 알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 지역사회에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했고, 이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문제, 가정불화, 그리고 학교나 사회에서의 적응 실패 등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을 끓이며 도움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들에게 손길을 내밀어줄 수 있는 기관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서 “이곳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생각이 ‘과거의 나’를 잊게 하여 주었고 내가 맡은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상담실에서 내담자들이 호소하는 어려움을 들어주고 문제해결을 위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애를 쓰던 일은 ‘봉사’를 하겠다고 나선 내가 오히려 내담자들에게서 봉사를 받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할 정도로 더없이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신문 칼럼을 통해서 그간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치면서 터득한 지식과 정보를 한인사회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며 누린 기쁨은 나의 인생 이모작의 수확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이제 새로운 모습으로 또다시 봉사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29개월간의 인생 이모작 일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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