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제‘영문성 문화원’

2013-06-22 (토)
크게 작게

▶ 김희봉 수필가

“형님, 100년 묵은 은행나무 아래 붉은 작약이 만발했습니다. 김제 청하 마을, 저의 고택 꽃밭에서 시와 음악이 흐르는 문학의 밤을 펼쳐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채영규 농부시인이 전갈을 보내왔다. 글로 맺어진 문정(文情)이 참 징하게 붉기도 하다.

올 초여름. ‘버클리 문학’ 창간호를 한국에서 내기로 하였다. 그동안 버클리 대학 동아시아 프로그램을 다녀간 한국의 작가들 중에 연이 닿는 분들과 이곳 버클리 문학회를 중심으로 글을 써온 이민 문학인들이 함께 책을 발간하기로 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고은, 오세영, 문정희, 김기택 시인 등과 권영민 평론가, 그리고 조경란, 김연수 소설가 등 20여분이 흔쾌히 참여해 주었다. 그리고 이곳 북가주에선 25여 동포문인들이 글을 내었다.


한국의 저명 작가들과 미국의 이민문학인들 40여명이 함께 책을 내는 시도는 이민문학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런 시도의 뿌리가 되는 작업이 1990년대 초에 북가주에서 있었다.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버클리에 왔을 때 동포문인들의 글을 모아 ‘33인의 만남’이란 책을 낸 일이다. 하지만 한국 작가들의 참여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 창간호의 발행은 특별한 이민 문학사적 의미를 새겨보게 하는 것이다.

‘버클리 문학’ 창간호의 주제는 ‘세계문학 속의 한국문학’이었다. 주간을 맡은 나는 창간사 서두에 이렇게 썼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한국문학이 그 프론티어에 있는 이민문학과 함께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민문학이란 세계와의 접경에서 모국어로 쓴 이민자들의 삶이 농축된 또 하나의 한국문학의 현장이자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창간호의 출판기념 콘서트가 열리기 전, 우리 일행들은 1박2일 일정으로 김제 채 농부시인의 집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듣던 대로 김제는 너른 만경벌판의 곡창지대였다.

40대 채시인은 오래 전에 청하마을로 들어와 밭농사와 유기농을 일구고 있었다. 옛 만석꾼의 고택을 사들여 너른 정원과 집 안팍을 어머니와 둘이서 손끝으로 가꾸었다. 농사꾼이면서 신학과 문학에 심취해 목회자이자 시인이 되었다. 농부시인이라고 불리길 좋아하는 그는 이곳에 ‘영문성 문화원’이란 현판을 내걸었다. 연로한 교역자나 문학인들이 지나가다 쉴 수 있도록 쉼터로 열어놓은 것이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큼지막한 현수막이 걸려있다. “버클리 문학 창간기념 김제 영문성 문화원 방문 환영!” 초저녁 어스름이 내리자 밝은 수은등을 켜고 우리는 작약이 만발한 정원에서 ‘문학, 자연과 원시’로 명명한 문학의 밤을 열었다.

동네 유지들이 다 모였다. 우리는 버클리 문학에 실린 시와 수필들을 낭독했다. 서울에서 온 젊은 첼리스트의 중후한 첼로 음을 배경으로 낭송을 하고, 김제에서 온 클래식기타 동호인들이 펼치는 정겨운 옛 노래들에 한껏 취했다.

드디어 그날 밤의 클라이맥스 시간이 왔다. 채 농부시인의 어머니를 꽃밭 무대 위로 모셨다. 팔순 가까우시지만 평생 농사일로 꿋꿋하신 어머니께서 함박웃음을 머금고 오르셨다. 우리들이 준비한 조그만 선물을 드렸다. 이 선물은 채 농부시인이 내가 미국을 떠나기 직전 부탁한 것이었다.

“형님, 이번 제 고향으로 모시는 버클리 문인들은 제가 존경하는 아름다운 손님들입니다. 오셔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께 ‘장한 어머니상’을 드려주세요. 평생 못난 아들을 위해 손끝이 문드러지도록 살아오신 어머니께 효도 한번 하고 싶습니다.”거름 내 구수한 시골의 인정은 밤이 깊어갈수록 작약 빛 보다 더 징하게 붉어갔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