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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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배려하는 마음

2013-06-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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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미자 수필가

조카딸의 결혼식이 있어 난생 처음 뉴욕엘 갔다. 동행한 딸도 뉴욕이 처음이어서 우린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 마중 나온 대학후배는 대학신문사 기자였고 졸업 후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롱아일랜드에 사는 여동생은 퇴근 후 집에서 따뜻한 저녁을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렸다. 우리 모두 이민을 오고 27년 만이다.

사촌 동생이 하루 우리와 함께 나가 지하철을 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은퇴 후 뉴욕의 교외에 사는 친구는 참나물과 반찬을 만들어 가져 왔고, 운전 잘하는 남편과 함께 오후 내내 맨해턴 관광을 시켜주었다. 세월이 45년이나 지난 후라 길에서 만나도 서로 알아보기 어려운 친구가 고맙고 진한 우정에 가슴이 찡했다.

또 대학후배가 매주 한 번씩 봉사하고 있는 뉴욕의 식물원을 방문했다. 이상한 봄 기후 때문에 꽃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지만, 개나무라는 커다란 흰 꽃과 겹으로 핀 분홍 벚꽃이 만발하고 있었다.


일주일 시내여행 관람권을 사서 열심히 다니면서 우린 가는 곳마다 외국 관광객들과 친구가 되었다. 하루는 지하철에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준 미국 중년 아저씨의 한국인 여자 친구와의 슬픈 사랑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젊은 날 멋진 한국여인을 놓쳐버린 아쉬움을 30년 만에 고백한다며 우리와 함께 웃었다.

잠시 후 젊은 남녀 한쌍이 무거운 여행가방을 들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왔기에 나는 가방을 빨리 붙들어 주었다. 알고 보니 남자 친구랑 어머니 집을 방문하고 비행기를 타러 가는 코넬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었다. 직장인 텍사스로 가는 중이라고 했다. 나는 예전에는 나이가 든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서로 가방도 붙들어주며 살아갔는데, 미국이나 한국이나 이젠 그런 좋은 풍습이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그러자 크리스틴이라는 아가씨는 가방을 들어주어 고맙다면서 나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 말을 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당신을 따라 좋은 풍습을 지키도록 할게요”얼마나 밝은 미래가 상상되는가. 그래, 세상은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사람들이 있어 존재하는 거다. 우리가 내려야 할 지하철역을 통과해버려 시간을 조금 잃었지만 참 행복했다.

저녁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자식 또래의 젊은 미국인이 일어나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역시 미국에도 가정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 있다고 고마워하며 나는 앉았다.

지난날 한국 방문 시 서울역 지하도 계단을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오르내리며 끙끙 거리던 우리 모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나가는 모두가 바쁘게 무표정하고 무관심하게 스쳐 갔다. 할 수없이 용기를 내어 어느 젊은 남자를 붙들고 ‘좀 도와주세요’ 라고 청해야만 했다.

지하철에서 한국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눈을 감고 잠을 자거나 모른 척 딴전을 피웠다. 나도 아예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고 자리 양보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래 얼마나 피곤할까. 젊은 자네들이 앉아 가시오” 하며 마음을 접었다.

아름다운 풍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젊은이도 훗날 반드시 노인이 된다는 진리는 달라지지 않을 텐데, 어찌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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