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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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푸르름

2013-05-1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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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중 수필가

바닷가로 나가 혼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걸었다. 시원한 바다 바람이 혼자 걷는 길에 동행이 되어 준다. 파도치는 바다의 냄새가 정겹다. 오랜 여행 끝에 안식처에 닿은 것처럼 몸과 마음이 푸근해지며 내 영혼에 파고든 죄와 상처들이 말끔히 씻겨지는 것 같다.

언제보아도 바다는 큰 가슴의 생명체이다. 끝없이 출렁이며 크고 작은 파도를 만든다. 이따금 무섭게 노하며 공포감을 주기도 하지만 다시 어머니의 품처럼 너그럽고 평화로워진다. 물결을 이루며 해안으로 몰려드는 파도는 온 힘을 다해 모래밭 위로 달려들어 조금이라도 더 멀리 왔음의 흔적을 남기려 한다. 어떤 파도는 성공하여 다른 파도가 이루지 못한 자취를 모래밭 위에 크게 남겨 놓기도 한다. 그러나 흔적은 다시 다른 파도에 의해 지워진다. 마치 우리의 삶 속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기려는 노력과 같다.

딸들이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행복한 여름날을 보내곤 했다. 어머니는 무좀이 심하여 고통스런 당신의 발을 모래 속에 묻고 태양의 열기로 뜨겁게 찜질을 하셨고 어린 딸들은 모래 위로 뛰어 다니며 조개껍질을 주워 모으고 둘러앉아 모래성을 짓고 허무는 놀이에 열중하며 재미있어 했다. 그렇게 우리는 바다의 품에 안겨 주말의 오후를 즐겼었다.


인간은 사랑하고 생명을 얻고 생명을 떠나보낸다. 내 어머니도 파도처럼 왔다가 세월에 밀려 떠나 가셨다. 바다 냄새, 파도소리만 들어도 가슴 속에는 어머니와 공유 했던 추억들이 되살아나며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결국 어머니의 인생도 한 차례의 물결이었고 그 물결은 파도가 되어 가족들 가슴에 큰 사랑을 남기고 사라졌다.

청옥 빛 바다는 그 깊은 곳에 온갖 것이 다 들어 있다. 벗어던진 신발도 들어있고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슬픔도 있고, 태평양 넘어 고향이 그리운 사람들의 눈물도 있다. 술 취한 사람들의 소변도 있고 갈매기의 울음도 있다. 과음한 사람들의 토설도 들어 있고 분노한 사람들의 욕설과 침도 들어 있다. 먹다 버린 깡통과 음식도 있다. 재가 되어 뿌려진 문우의 넋도 들어 있다. 크고 작은 생선들도 헤엄치며 살고 있다.

바다는 숱한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큰 가슴을 열어 품어안은 채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푸르름으로 출렁인다. 그 모든 것을 담고도 저리 푸르를 수 있으니 참으로 그 포용이 감동적이다. 아마도 바다는 수양하는 선비처럼 속으로 때로는 거대한 해류가 흐르게 하고 때로는 소용돌이치게 하고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뒤섞어 주면서 끊임없이 자기 정화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내 속엔 여러 유형의 감정들이 숨겨져 있다. 상실의 아픔도 있고 노여움과 미움도 있고 배신의 상처도 있다. 그 오염된 것들을 마음에서 씻어내지 못해 나는 나만의 푸르름이 없다. 작은 가슴을 가진 내가 어떻게 푸르를 수 있겠는가, 푸르름으로 출렁이는 저 바다가 한 없이 부럽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은총이다. 바다를 보며 그가 살아 있고 또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고 무엇을 가지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유스러움을 느낀다. 바다 앞에선 나도 바람이 되고 파도가 된다. 그리고 나 또한 그 푸르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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