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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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지교(知音之交)

2013-04-2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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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봉 수필가

“여기는 인도양, 세이젤(Seycelles) 군도이다. 우리에겐 낮선 이름이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도 등재된 지상 최고의 ‘환초’ 낙원으로 유명하다. 제주도의 4분의1 정도의 소국이어도 거의 1,000피트나 솟은 마헤섬이 110개나 되는 산호섬들을 거느리고 있다. 희귀새인 삼광조와 200년 묵은 바다거북이 사는 곳. 나는 지금 세이젤 공화국 환경부 장관의 초청으로 몇 주일을 머물고 있다…”죽마고우 택이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첨부한 사진을 보니 야자수가 늘어선 백사장과 에메랄드 빛 바다가 어우러져 천국의 정원 같다. 그 앞에서 초로의 택이가 정부 대표들과 환담하는 모습이 훤하다. 한국 신도시 개발 공기업의 최고 정책수립자로 수십년간 일해 왔던 그는 지금 컨설턴트로 한국의 개발과 환경보호를 양립한 기술을 제3국에 전수하기 위해 출장 중이었다.

택이를 생각하면 참 자랑스럽다. 그는 나와 중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다. 자그마하지만 다부진 체구에 선한 인상이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피난지 부산에서 택이네는 큰 누나가 약국을 한 덕에 우리 중에서 형편이 제일 나았다.

나는 서울로 진학했지만 택이는 가업을 돕느라 부산에 남아 있다가 지방대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뒤늦게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공채시험으로 겨우 비집고 들어간 대기업 건축 개발부에서 오직 정직과 성실하나 만으로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내가 제대 후 유학길에 오를 무렵, 그는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한국 재벌기업의 고질적인 학연의 연결고리에서 소외돼 승진코스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결국 토지개발공사로 옮겨갔다.

공기업으로 옮긴 것은 아마 그가 내린 최상의 선택이었던 듯싶다. 도시 개발에 따른 이권이 유독 많았던 그 곳에서 바보처럼 고집스럽게 청렴했던 그가 승진의 기회가 올 때마다 상사들의 눈에 띈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남들이 싫어하는 궂은일을 도맡아했다.

그 덕에 그는 1급 요직인 부산지점장까지 승승장구했다. 수많은 일류대학 출신 브레인들을 수하에 거느리고 앞길을 열어주었다. 퇴직 후인 지금도 그는 굴지의 건축설계회사의 고문으로, 한국 우량아파트 심사위원으로, 개발연구소장으로 왕성히 뛰고 있다. 요즘은 그의 입지전적 경험을 살려 인성과 정직을 강조하는 인기강사로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택이가 성공했어도 내겐 여전히 어린 친구다. 내가 미국 온 후 근 10년 세월동안 매년 명절이면 식솔들을 거느리고 내 부모님을 찾아 뵀었고, 어렸던 내 동생들에게도 물심양면으로 형 노릇을 해주었던 의리의 사나이다.

어린 시절 함께 자라 비밀이 없는 친구를 죽마고우라 하고, 물과 고기 같은 숙명의 관계를 수어지교(水漁之交)라 한다. 그런데 나는 택이를 생각할 때마다 지음지교(知音之交)란 말이 떠오른다. 멀리서 백아가 뜯는 거문고 소리만 듣고도 친구의 마음을 읽어내는 고향친구 종자기의 중국 고사 때문일 것이다. 눈빛만 보아도 마음과 영혼을 읽어내는 친구. 이 나이에도 나는 아직 그의 음덕에 기대기만 한다. 그러나 택이에 대한 자랑은 내 평생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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