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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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나와 스노퀄미

2013-04-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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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여춘 시애틀 지사 고문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엔 명승지가 참 많다. 대표적인 예로 애리조나의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이 흔히 꼽힌다. 시애틀에 이주하기 전 LA에서 20여년 살면서 그랜드 캐년과 이웃 유타 남부 광야에 산재한 여러 국립공원을 너댓 번 찾아갔었다. 매번 그 신비스러운 형상과 웅장한 규모에 압도돼 넋을 잃을 정도였다. 한국에선 도저히 볼 수 없는 장관이다.

이달 초 그랜드 캐년에 다시 찾아갔다. 어언간 할아버지가 돼 손자손녀를 동반한 십수년만의 재방문이었는데 감회는 여전했다. 주차장이 넓어지고 편의시설도 많아졌지만 조망 자체는 그대로였다. 국립공원 당국의 철저한 원상보존 덕분이다.

하지만 이번 가족여행의 주 목적지는 그랜드 캐년이 아니라 그곳에서 남쪽으로 2시간 남짓 운전 거리인 세도나(Sedona, 현지인들 발음은 시도우너)였다. 그곳 역시 예전에 가본 적이 있다. 그 때는 그랜드 캐년에서 피닉스와 투산으로 내려가며 둘러본 주마간산격 관광이었다. 이번엔 계곡의 멋진 리조트에 3박4일 머물며 세도나를 속속들이 구경했다.


세도나는 동네 이름이다. 초기 정착자 데오도어 칼튼 슈네블리가 1902년 우체국을 열면서 부인 이름을 따 ‘세도나 우체국’으로 명명한데서 유래했다. 당시 55명이었던 주민 수는 반세기 동안 고작 100명이 늘었고, 1960년대까지도 전기 없는 집들이 수두룩한 두메산골이었지만 1990년대 이후 1만여명의 상주인구를 가진 세계적 관광촌으로 자리매김 했다.

세도나는 사방에 붉은 바위(Red Rock) 산봉우리들이 둘러 있다. 웅장한 모습의 ‘성당바위’가 특히 인기 있다. 전망 좋은 ‘레드 록’ 주립공원, 바위 위에 엎드려 계곡물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슬라이드 록’ 주립공원, 바위산에 붙은 ‘홀리 크로스 채플’ 예배당 등에도 관광객이 꼬리를 문다.

세도나는 경치 못지않은 인기품목을 갖고 있다. 우리가 ‘기’라고 부르는 지구 에너지다. 도심의 공항지역, 성당바위, 서쪽의 보인튼 캐년과 남쪽의 종 바위 등 4곳은 지표에서 휘몰아치는 에너지가 유난히 강력해 ‘Vortex’(소용돌이)로 불린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 명상, 요가, 기수련 등에 심취하는 ‘뉴 에이지’ 세대들이 기를 받으려고 모여든다.

방문 첫날 저녁 혼자서 계곡 위 언덕으로 올라가 두 팔을 벌려봤지만, 워낙 감각이 둔해서인지 기를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바위산 위에 뜬 북두칠성은 깜짝 놀랄 만큼 또렷하게 보였다.

기 체험에 실패한 것보다 더 크게 실망한 게 있다. 세도나가 너무 개발되고 상업화됐다는 점이다. 경승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면 동네 집 지붕이나 업소간판이 들어가기 일쑤다. 스포츠·레저·명상·음악·미술·영화 등 행사가 연중 줄을 이으며 북새통이다. 유타 남부의 캐년랜드 국립공원을 빼닮았으면서도 국립공원이나 국립보호지로 지정되지 못했다.

세도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시택공항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애틀 귀환이 실감났다. 비는 계속 이어졌고 산엔 폭설이 내렸다. 세도나의 레드 록과 이름이 비슷한 스노퀄미 패스의 레드 마운틴에서 눈산 등반을 하던 한인 여의사가 눈사태로 목숨을 잃었고 다른 한인 등산팀 일행 12명은 구사일생으로 화를 면했다. 인근 다른 산에서도 실종사고가 났다.

이런 인명사고는 너무나 안타깝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시애틀의 산들이 세도나의 붉은 바위산들과 달리 여전히 찬탄과 함께 경외의 대상임을 일러준다. 태고의 자연이 간단없이 숨 쉰다. 사이 산의 노적봉이나 방울뱀 산의 정상 바위에서 추락사고가 빈발하지만 철책이 설치되지 않는다. 한인들도 자연을 향유하는 만큼 자연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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