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사실 자신을 안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우선 나 자신의 모습이 달리는 기차의 창 밖 풍경 같아서, 환경과 처지에 따라 잘 바뀌기 때문이다.
‘나’라는 대상을 놓고 내가 생각하는 자화상,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또는 직장 동료에게 비친 나의 모습, 나아가 그냥 알고 지내는 지인에게 준 인상 중 어떤 것이 진정한 나의 모습일까? 또한 믿음의 동료들에게 비친 모습은 어떨지?
‘통전성’(integrity)을 지닌 사람을 겉과 안이 같은 사람, 혼자 있을 때나 타인들과 같이 있을 때나 그 언행이 일관적인 사람이라고 스스로 정의해 보는데, 나는 과연 어느 정도의 통전성을 가진 사람인가 묻게 된다.
사도 바울도 자기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지체속의 다른 법이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는다고 솔직한 고백을 했다. ‘침묵’의 저자 엔도 슈사꾸는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허영심을 버리기가 어려운 존재”라고 말했는데,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마음은 하늘을 걷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하지만 늘 육신에 끌려 다니는 안타까운 자신을 본다.
‘내 안의 두 사람’에는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와 함께 가시적인 한국적 ‘나’와 미국적 ‘나’의 의미가 있다. 대학과 군 복무를 마치고 새파랄 때 이곳에 왔는데, 어느덧 이곳에서의 삶이 더 오래되었다.
고국을 떠나올 때 이미 몸에 밴 한국적 정서와 문화가 내 가슴에 고스란히 있지만, 오랜 세월 이곳 문화와 생활양식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고국 방문 시 옛 친구들을 만나면 한국적 언행(영어 발음을 포함해)으로, 미국의 직장 동료나 친구들에게는 또 이곳 문화로 대하니 꼭 자신이 두 사람 같은 생각도 든다.
미국 사람들은 식사 때 씹는 소리를 낸다든지, 입에 음식을 담고 이야기 하는 것을 극히 싫어한다. 또한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결혼, 직업, 나이와 같은 사적인 질문을 한다든가, 키나 용모 등 외모를 언급 하는 것(칭찬은 괜찮겠지만)을 불쾌하게 여긴다.
나아가 농담이라도 상대방의 약점을 소재로 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들은 아주 가까운 가족 구성원이나 친구에게도 “고맙다”든지 “미안하다”든지 기본적인 예의를 표시하는데, 나는 아직도 이 점에서는 합격선을 넘지 못한 것 같다. 한 가지만 더 든다면 이들은 타인이 자기의 물건에 허락 없이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한다. 길에서 만난 어린아이라도 귀엽다고 해서 함부로 만져주는 것은 금물이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스스로 질문해 본다. 땅에 사는 육신의 사람과 하늘의 사람이 부딪치고, 한국적 문화와 미국적 문화에 낀 채 왔다 갔다 하니 선뜻 대답이 쉽지 않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을 다한 후 내가 받을 평가가 진정 ‘나’라는 것만은 잊지 않으려고 오늘도 말씀을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