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잉크펜의 마법

2013-04-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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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예진 / UCLA 졸업

가능성이 희박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는 행동들이 있다. 특히 초등학생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는 더 그랬다. 예를 들자면, 조그마한 종이 쪼가리에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의 이름을 적어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을 모아 씹다 뱉은 껌처럼 동그랗게 말아서 아끼는 펜 끝에 봉합된 부분을 열고 그 속의 잉크 튜브 안으로 넣는 것이었다.

그 후에 그 펜을 아무 탈 없이 잉크가 동날 때까지 쓰면 그 남자아이와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믿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은 모두 한동안 각자의 미션 펜만 쓰곤 했었다. 믿지는 않았지만 설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학교 수업 도중 그 펜으로 필기를 하다가 그 남자아이 쪽을 한번 보고는 혼자 수줍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복권을 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복권은 이익률 계산, 전문가의 조언 등을 모아 심도 있는 검토를 통하여 결정하는 투자 전략과는 다르다. 복권은 자기만의 심각한 과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는 분들이 아니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또는 그냥 기분으로 사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산 적이 있었다. 솔직히 기대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당첨 여부를 확인할 때 가슴이 살짝 떨렸던 건 사실이다.


이런 것들은 남에게는 허무맹랑할 수 있고, 또 보통 우리 자신도 가볍게 여기고 넘어가지만 기분을 좋게 만드는 작고 깜찍한 노력이다. 물론 나는 그 초등학교 같은 반 남자아이하고는 이어지기는커녕 이제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복권당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런 혼자만의 내기는 은근히 나를 들뜨게 한다. 착각이 아닌 착각을 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무엇엔가 희망을 걸고 싶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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