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티화나에서 만난 경찰

2013-02-0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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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배우며

▶ 최청원 내과의사

티화나의 한 모터사이클 경찰이 이렇게 말했다 : “미국 관광객들에겐 20달러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일정이 바빠 서두르기도 하고 당황해서 얼른 현금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는 6년 동안 20~25 달러씩 3천건의 뇌물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관광객만이 아니다. 마켓에서 장을 본 한 멕시코 부부는 티켓을 떼려고 기다리는 경찰에게 장본 것의 반을 주고 면죄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나도 당한 적이 있었다. 12년 전, 트럭 3대에 의류와 생활용품 등 구호품을 잔뜩 싣고 의료봉사 길에 나섰다가 티화나 국경 경찰에 걸린 것이다. 내가 탄 트럭은 운 좋게 ‘뺑소니’를 쳤지만 다른 의사들이 몰던 나머지 두 대는 꼼짝없이 잡혔다. 차는 압류당하고 운전자들마저 행방이 묘연했다. 불안에 떨 동료들을 생각하니 의료봉사팀의 책임자로서 그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뺑소니쳤으니 그 트럭을 타고 찾아갈 수도 없어 택시를 대절하여 타화나 본서로 찾아갔다. 모르겠다는 퉁명스런 대답에 한 모터사이클 경찰에게 다가가 ‘흥정’을 시작했다. 일행의 소재지를 알려주면 20달러, 석방시켜주면 다시 20달러…내가 탄 택시를 에스코트하며 이곳저곳을 뒤진 끝에 일행을 찾아준 그는 돈은 차에서 내려 골목길로 들어가 아무도 안 볼 때 달라고 말했다.

그 후엔 티화나로 들어갈 때마다 일행의 차량을 분산시키는 등 나름 대비는 한다. 그러나 교통 안내판이 제대로 없어 미로를 헤매듯이 시내를 돌다보면 어디선가 경고등을 번쩍이며 나타나는 경찰들을 완전히 피하기는 쉽지가 않다.

20달러를 건네자 흰 봉투에 넣어달라던 경찰도 있었고, 20달러를 꺼내는 순간 지갑 안에 든 몇 장의 지폐를 보았는지 80달러를 주든지 본서로 들어가 벌금을 내고 운전면허증을 찾아가라던 경찰도 있었다. 마음속의 분노를 삭이면서 흥정한 결과 40달러로 ‘낙착’, 그의 요구대로 남이 안 보게 위반티켓 수첩 안에 넣어서 건넸더니 안녕히 가라고 친절히 인사까지 한다.

아니, 무슨 봉사 떠나는 의사가 경찰에게 뇌물을 건네는가 싶어 때론 씁쓸한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상황윤리,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말을 되새겨보았지만 마음이 개운치는 않았다.

지난달 말 티화나 시내를 거처 국경진입로로 가는 도중에 번쩍대는 경찰의 경고등이 백미러에 들어왔다. 현금 20달러를 미리 꺼내 주머니에 넣어둔 후 차 창문을 열고 그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 “우린 바하의 가난한 원주민을 위한 봉사를 마치고 10시간 이상 달려오느라 너무 피곤하다, 낯선 지역의 운전이 쉽지도 않다” 고 투덜대며 “봉사의 대가가 이것이냐”는 푸념까지 늘어놓았다.

“크리스찬이냐”는 그의 질문에 그렇다고 하자 자신도 크리스찬이라면서 어디서 무슨 봉사를 하느냐고 물었다. 국경순찰대 검문시 증명서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봉사사진들을 보여주었더니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종교관과 봉사관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난 겉으로는 경청하는 척 하며 속으로는 ‘저 장황한 설명이 끝나면 뇌물 흥정이 시작되겠지, 그간 가격이 얼마나 올랐을까’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악수를 청했다.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잡으면서 “당신 좋은 일 많이 하시는 군요. 신의가호가 함께 하시기를”이라는 말을 남긴 그는 모터사이클 굉음을 남기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주머니 속에 남아있는 20달러 지폐를 미안한 마음으로 구겨 쥐며 하얀 구름이 남쪽으로 흘러가는 파란하늘을, 난 그날 한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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