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자랄 때 유독 큰 변화를 보이는 나이가 있다. 엄마만 의지하던 아이가 두살이 되면 질문이 뭐건 ‘노우’를 연발한다. 다칠까 싶어 주의를 주느라 ‘노우’를 너무 많이 들려준 게 엄마의 부주의였을까.
기저귀를 겨우 뗄만 하니까 벌써 반항이다. 엄마보다 또래 집단과 자주 어울릴 네살이 되면 ‘노우’에 하나 더 따라붙는 것이 ‘왜?’이다. 나도 아이들 키우면서 아이들의 성장 과정이니 최대한 성의를 다해 그 밑도 끝도 없는 ‘왜?’ 에 일일이 답해주다 결국엔 ‘엄마도 몰라!’라고 한 적이 있다. 어쩌면 그때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왜?’ 라고 물어 얻는 답이 세상과의 소통에 필요한 최소한의 장비가 되어줄지 모른다.
만 일곱부터 2, 3년에 걸쳐선 유아기의 특성과 청소년기의 전조현상을 동시에 갖춘 이른 사춘기 현상을 보이다 본격적으로 사춘기가 되면 ‘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에요!’ 하는 아이와 ‘그럼 니가 애지 어른이야? 내말 들어!’ 하는 엄마와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대립이 공중으로 튀어 올라 불꽃놀이를 한다.
또 만 열너덧이 넘어가면 뭘 하는지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뭔가 물어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아이 앞에서 엄마들은 더 이상 버틸 기운을 잃는다. 그저 남의 자식인 듯 밥이나 열심히 해줘야 하는 날을 지내다 곧 나라가 인정하는 만 열여덟 성인이 되면 어설픈 독립을 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큰 혼동 가운데 있음을 알면서도 아이와 어른이 반쯤씩 섞여 부디 미지근 정도만 해주었음 싶은데 아이들은 꼭 얼음물이었다가 끓는 물이었다가를 반복한다. 웃으며 돌아선 아이가 이유도 없이 화가 나 있고 달랜 이도 없는데 금세 ‘엄마 사랑해~’란다.
이런 특성은 독립적 개체로 자라나는 아이들의 건강한 모습이지만 그걸 겪는 엄마 입장에서는 종종 배은망덕이고 이유 없는 반항이어서 속이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성장에 따른 충격은 어찌 보면 오히려 엄마들에게 더욱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에 대한 자연스러운 ‘정 떼기’를 몇 해씩 간격을 두고 조금씩 겪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