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했다. 내가 처음 성서를 읽을 때는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는, 누추한 환경이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로마의 감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깨달은 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기쁨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쁨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성품이요, 기쁨은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도,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기뻐하며 살도록 초청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내 자신이 소유한 내 ‘순간’은 없다. 하나님은 어느 때도 우리의 생명을 걷어 가실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삶의 가치를, 아니 ‘순간’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삶을 즐겁게 살려면, 삶을 길게 구분하지 않고, 작은 단위로 살아야 한다. 멀리 보지 말고, 오늘을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오늘 보다도 내 앞에 다가오는 한 시간을 기쁘게 살려고 실제로 행동해 보는 것이다.
가능하면 부정적인 생각은 피하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친구와 만나보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소외되고 헐벗은 자들을 돌보는 것은, 내재적인 기쁨을 함양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쁨을 추구하는 삶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바로 오늘이다. 오늘은 대충 그냥 살고, 내일부터 기쁘게 살자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에겐 실제로 내일은 없다. 내일은 신의 영역이요 나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살라”는 말을 좋아한다.
성서의 시편에도 “이 날은 여호와가 만드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언젠가 내가 처한 환경이 바뀌면 좋은 날이 오고, 기뻐할 수 있으리란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늘보다 좋은 환경의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 날이 오더라도 그때는 자신이 더 탐욕적인 사람이 되어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살고 있는 ‘지금’ 기쁘게 살 수 없다면, 내일이나 내년에 기쁘게 살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았다. 새해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해 다짐을 한다. 새롭게 운동을 하려고도 하고, 좋은 다이어트 프로그램으로 체중을 줄이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기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근원을 추구하는 중요한 일일 것이다. 조용한 미소를 띠고 기쁘게 살려 노력하는 사람은 주위를 밝게 하고 행복의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행복의 바이러스를 전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우리 사회는 더욱 건강해지고 사랑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