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익명의 기부자

2012-12-15 (토)
크게 작게

▶ 유분자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아프리카 차드 방문을 앞둔 지난달 초는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건강검진을 받으랴, 예방접종을 받으랴, 밀린 업무 처리하랴….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차드 방문이지만 워낙 장거리 여정이어서 내심 걱정이 됐다. 내 나이 벌써 70대 중반을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나이를 생각하라” “왜 또 가느냐”는 등 걱정의 전화가 줄을 이어 사실 약간 짜증이 난 상태였다. 또 그런 전화려니 하고 수화기를 귀에 댔다. 중년여성의 목소리였다. “참 좋은 일 하시네요”하고는 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우물 두 개를 기부하고 싶으니 주소를 알려주면 체크를 보내겠다고 했다.

누구 이름으로 기부하겠느냐고 물으려는데 전화가 끊겼다. 통화시간은 길어봤자 2~3분.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서둘러 여행 짐을 꾸리느라 그 여성과의 전화는 잊었다.


다음날 프랑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파리 공항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차드 행 국제선으로 갈아탔다. 차드에서 우물 파는 공사 현장까지는 비포장도로로 꼬박 대여섯 시간을 달려야 한다. 간절히 우리를 기다렸던 주민들은 눈물을 글썽이고 품에 안긴 꼬마들은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며 뺨을 비벼대기도 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그 무엇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10여일의 강행군으로 잔뜩 지쳐 돌아왔다. 여독이 가시지 않은 채 사무실에 출근해 보니 그 여성으로부터 편지가 와있었다. 봉투에는 우물 두 개 파는 비용 6,400달러짜리 체크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동봉된 메모지의 내용은 감동적이었다. 우물 두 개 모두 ‘지저스 크라이스트’ 이름으로 기부하겠다는 것이다. 메모를 읽는 순간 피곤이 거짓말처럼 싹 가셨다.

문득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그의 저서 ‘내어줌(The Giving)’에서 독자들에게 한 질문이 떠올랐다. “누가 더 행복한가. 받는 사람인가 주는 사람인가. 자신이 가진 것을 베푸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것을 받는 사람인가.”

이에 대해 명쾌하게 답을 내놓은 이가 ‘독도 지킴이’ 기부 왕 김장훈이다. 미국에서도 종종 자선공연을 열어 미주 한인들에게도 친숙한 그는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기부한다”고 말한다. 얼마나 솔직하고 대담한가. 아직 아파트 한 채 사지 않았지만 베푸는 삶을 통해 행복해졌다며 통 큰 기부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차드 방문을 통해 나 자신도 가수 김장훈처럼 행복한 인간으로 거듭 난 느낌이다. 기부액이 적든 많든, 기명이든 익명이든, 나눔을 실천하기는 마찬가지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는 선행도 적지 않지만 기부는 널리 알려서 사람들이 공감하고 따를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눔의 문화라는 좋은 바이러스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엔 부자로 머물지 않고 자선가의 길을 선택한 거인들이 많다. 글로벌 자선 대통령으로 우뚝 선 빌 클린턴, 억만장자들의 기부서약운동을 주도하며 자선의 틀을 바꾼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 자신의 스타파워를 내세워 수단 문제를 해결한 배우 조지 클루니. 어쩌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부의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개인의 열정과 사랑인지도 모른다.

연말에는 기부와 자선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이들의 가슴 벅찬 이야기를 신문에서 자주 만나면 좋겠다. 나눔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