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날 갑자기

2012-12-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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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교 시인

한국에서 방영되는 건강 프로그램 가운데 ‘어느날 갑자기’라는 것이 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심근경색이나 뇌졸중으로 쓰러져 생사를 헤매게 되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해서 몇몇 연예인들을 초청해 놓고 그들의 건강검진을 통해서 미리 건강을 지키자는 프로그램이다.

어제 가까이 지내는 친구 남편의 영결식이 있었다. 그 친구의 남편도 ‘어느날 갑자기’의 케이스였다. 며칠 전 자신의 가게에서 쓰러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불구의 객이 되어 버렸다. 인생은 이렇듯 무상하고 허무하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듯 어제 내내 비가 심하게 내렸고 마지막 하관식을 할 때도 날씨는 더 음울했다.

남편을 잃은 친구가 시인이어서 그분을 대신해 이렇게 한구절의 시를 읊었다. “내가 잠깐 머물던 시간들은 아름다운 날들이었네”라고. 누구나의 삶은 그 인생이 어떻든 다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살아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들의 삶은 아름답고 한번 살아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며칠 전 나도 남편이 심한 탈수증이 생겨 응급실에서 일곱 시간이나 보낸 적이 있다. 처음엔 식중독인가 했는데 의외로 바이러스에 걸려서 탈수증이 생겼고 링거 주사를 세병이나 맞고야 겨우 응급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보통 때는 공기나 물처럼 고맙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상의 일들이 정말 고맙고 나는 그동안 많은 일상의 감사함을 당연한 것인 듯 받아들이고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일생을 한 번도 남편이나 나로 인해 응급실에 와 본 적도 없고, 우리 부부는 생각보다 더 건강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나는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각자의 건강을 더 잘 챙기자고. 열심히 운동하고, 더 많이 걷고, 더 즐겁게 지내고, 더 좋은 음식만 먹자고. 왜냐하면 한사람이 아차 하는 사이에 다른 한사람도 같이 불행해지니까.

부부나 가족들은 끊을 수 없는 연결고리로 매듭지어 있다. 한 개의 고리가 끊어지면 다른 고리들은 저절로 떨어지게 된다. 그날 응급실에서 만난 뚱보의 흑인 여자는 혈당이 무려 300이 넘는다는 얘기를 옆에서 들었다. 바로 쓰러지기 직전의 여자였다.

늙으면 모두들 한가지의 지병들을 갖게 된다. 심장의 문제가 있던지, 당이 있던지, 다리나 허리가 아파 잘 걷지를 못하게 된다. 걷지를 못하면 삶의 질은 확 떨어질 수밖에 없다. 창밖을 바라보니 현란하게 색색으로 물들었던 단풍잎들이 비바람에 하나 둘씩 떨어지고 있다. 우리네 인생도 바로 저 낙엽과 같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한때는 찬란하게 아름다웠던 젊음도 지나고 어느날 훌쩍 늙음이 찾아와 바람처럼 구름처럼 흔적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죽음도 한순간 홀연히 찾아와 모든 것을 낙엽처럼 흩날리게 합니다. 그대여! 이젠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과 멍에를 내려놓고 훌훌 떠나십시오. 아버지가 마련하신 영원한 처소에서 평안히 쉬소서!’

밖은 오늘도 여전히 스산한 비바람이 불어대고 나는 떠나간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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