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젊은 날의 꿈

2012-11-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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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며 배우며

▶ 김옥교 시인

=내가 가끔 즐겨보는 프로그램 가운데 <러브 인 아시아>라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주로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같은 나라에서 온 젊은 여자들이 한국의 농촌 남성들과 결혼해서 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이 몇 년 만에 고향을 방문해 그리웠던 가족들과 상봉하고 회포를 풀어내는 따뜻하고 가슴 뭉클한 스토리가 대부분인데, 보통 한국의 사위들이 처가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주고 함께 여행도 하면서 정을 나누는 얘기들이라 그 프로그램을 보면 절로 미소가 나오고 그들의 이별 장면에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곤 한다.

그 이야기들은 나를 문득 40~50년 전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지독히 가난하던 때, 전 국민이 가난에 찌들어서 너나없이 고생을 하던 때를 상기하게 만든다. 대학 졸업하던 해까지 나는 유복한 집 막내딸로 부족한 것 없이 살았다. 그런데 사기꾼을 만나 친정이 하루아침에 망하고 나는 가난한 예술가를 만나 상상도 못할 가난을 겪었다.


우리 가족은 미아리 어느 산꼭대기까지 밀려가서 그야말로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마침 나는 영어를 할 줄 알았던 덕에 미군부대에 취직이 되었고 우리 식구들은 밥걱정을 덜게 되었다. 나중에는 미군 장교들 덕에 텔레비전까지 구입했다. 그 시절 텔레비전을 갖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내 아이들과 가족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고 동네방네 자랑을 한 것은 물론이다.

그 시절 제대로 된 프로그램도 없었지만 어쩌다 권투시합 같은 것이 나오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모여 시청하곤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 큰 애는 동네 아이들한테 그 대가로 돈 10원씩을 받고 으스대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나를 지탱해 주던 것은 물질이 아니라 문학이었고 시를 쓰는 시간이었다. 내가 비록 미국사람들 덕분에 먹고는 살지만 나를 붙잡아 주던 것은 내가 시인이라는 자부심과 대학을 나온 인텔리라는 점이었다. 이 자긍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나를 좋아하고 나를 행복하다고 믿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다.

지금 내 노후의 생활이 활력이 있고 살만하다고 느끼는 감정은 내가 하는 것들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거기에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적당하게 할일이 있고 건강이 있고 적당하게 쓸 돈이 있고 또 적당하게 놀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게 늙어갈 수 있다고 어떤 교수가 말했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종교이다.

젊은 날의 나의 꿈은 문학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미국에 오는 것이었다. 미국의 풍요를 이미 맛본 나는 미국에 오는 것이야 말로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우며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젊고 가난한 이혼녀가 꿀 수 있는 당연한 꿈이기도 했다.

그때 남편을 만났다. 내가 남편을 택한 이유는 그가 대학 출신이었고 성실하고 문학과 클라식 음악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운명은 우리 둘을 이어 주었고 처음엔 반대가 만만치 않았던 그의 부모들도 나중에는 나와 내 두 아이들을 더없이 잘 품어 주었다.

결국 나는 내 젊은 날의 꿈을 다 이룬 것일까. 아이들은 각자 잘 살고 있고 남편도 옆에 건재하고 나는 쓰고 싶은 글을 쓰며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으니 한 세상 잘 살고 있는 셈이다.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햇볕이 등 뒤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또 한해가 가고 있구나 느끼지만 쓸쓸함 보다는 잔잔한 행복이 밀려오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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