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의 묘지 미국의 묘지

2012-11-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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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온지 몇 년 되지 않은 어느 여름날에 겪은 일이다. 우리 식구는 워싱턴을 구경하기 위해 볼티모어에서 1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운전하며 가다가 점심으로 싸온 김밥을 먹을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마침 엘크릿지라는 마을에 들어섰는데 ‘Meadow Ridge Memorial Park’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공원이니 점심 먹는 장소로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해서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호수가운데 분수가 솟아오르고 그 주위로 오리들이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호숫가는 푸른 잔디로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여기저기 나무들이 서 있었다. 우리는 한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고 잠간 휴식도 취했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직장동료에게 ‘공원에서의 점심’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그 곳은 공원이 아니라 공동묘지라는 얘기였다. 마음이 섬짓해지는 한국 공동묘지만을 생각하고 미국 묘지문화에 익숙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 동료에게 “묘지(cemetery)라는 간판을 붙여야지 공원(park)이라는 간판을 붙이면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대답은 이러했다.

“미국에서는 묘지라고 하던 공원이라 하던 별로 의미의 차이가 없습니다. 묘지는 공원처럼 우리 생활 속에 늘 함께 있으니까요. 즉 삶과 죽음이 늘 공존하고 있는 곳이죠.”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 묘지라는 말은 내가 그동안 가졌던 한국식 공동묘지 선입관을 완전히 앗아가고 말았다.

20여년이 흐른 뒤 어느 날 조카뻘 되는 어린 아이가 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이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묘지 안에 있는 장의사에 들렸다. 그 때 한 장례 관계자가 묘지를 세일로 분양 중이니 미리 사두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니 사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이가 50도 안됐는데 내가 묻힐 자리를 미리 사야 하나?’라는 의심쩍은 자문을 하면서도 10살도 안 된 조카가 세상을 떠나는 ‘현실’을 보면서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친척들이 의논한 결과 10개 자리를 샀다. 내 것은 물론 어머니와 아내 자리도 여기에 끼어있다. 그 후 어머니를 비롯해서 친척 6명이 이곳에 잠들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올 때는 순서대로이지만 갈 때는 순서대로가 아니라는 또 다른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 고속도로든 지방도로든 길을 따라 운전하다보면 미국에서 볼 수 없는 산풍경이 벌어진다.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는 묘지들이다. 햇볕이 잘 드는 이른바 ‘명당짜리’ 남쪽 언덕은 으레 묘지들이 차지하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40여 년 전에도 이런 풍경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풍경을 다시 볼 때 어딘지 모르게 내 마음이 착잡한 것은 웬일일까? 미국의 공동묘지처럼 묘지들 사이에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지 않고 외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사람들은 먼저 간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 날 때마다 그곳을 찾아가 살았을 때처럼 ‘대화’를 나눈다. 한국에서는 죽음은 마치 나와 아무 상관없고 멀리 있을 뿐이라는 착각 속에서 묘지를 추석 한식 등 절기에 따라 형식적으로 1년에 한두번 찾고 만다.

지금은 한국에도 현대식 사립 묘지공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옛날에도 공동묘지가 있었으나 대개의 경우 저소득층들이 사용했던 정부관리 묘지였다. 고급 사립 묘지공원은 미국수준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여러 가지 공원시설을 가추고 있다.

요즘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화장 장례를 많이 하기 때문에 잔해를 보관하는 영안시설도 아주 잘 되어있다. 한국의 묘지문화가 미국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점심을 먹던 그런 공동묘지와는 아직도 거리를 두고 있는 현실은 죽음을 꺼려하는 오랜 전통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시골에 가면 많은 교회들이 정원에 묘지를 가지고 있다. 세상을 떠난 교인들이 이곳에 묻히는 것이다. 살아남아있는 사람들은 매주 먼저 천국으로 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 얼마나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아름다움인가.


<허종욱 한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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