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지막 집착

2012-10-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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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이다. 한 여름 무성하던 나뭇잎도 떨어지고 태양빛에 익은 열매도 떨어진다. 사람도 젊었을 때는 정열적인 사랑을 꿈꾸고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 돈을 위해 욕망을 불태운다. 그리곤 늙어가면서 이런 갖가지 욕망들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는다.

그런 욕망의 짐을 늙어서까지 지고 산다면 그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나이가 들면서 가볍게 살라고 하나 둘 내려놓게 해 주시는 것 같다.
실제로 남편은 젊어서 치열하게 움켜잡고 있던 모든 욕망들을 다 내려놓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단다. 이젠 그 즐기던 골프도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아쉽지도 않단다. 아무것도 집착할 게 없단다. 다 산 사람처럼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자존감, 흔히 말하는 자존심이다.


남편은 은퇴한지 꽤 오래되었다. 별다른 수입 없이 곶감꼬치에서 곶감 빼먹듯이 하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빼 먹을 것도 없고 하여 궁리 끝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기로 했다. 추억이 깃든 정든 집을 팔려니 서운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집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경제적인 부담뿐 아니라 아이들이 장성하여 나가고 남편은 한국에 계신 노모 때문에 일 년에 반 이상은 한국에서 살고 있는 . 큰 집에서 혼자 산다는 것이 호사를 부리는 것만 같아 나도 집에 대한 미련을 떨치고 그 집을 파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워낙 부동산 매기가 없어 차선책으로 세를 놓았다. 그런데 세입자와 갈등이 생겼다. 세 식구가 주거용으로 쓰겠다고 계약을 해 놓고 막상 입주하고 난 뒤에 보니 홈 비즈니스를 차린 것이다. 게다가 빈방에 장기 투숙자까지 두었다.

그 일로 그들과 계약 조건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가운데 문제가 터졌다. 그들의 태도가 우리 보기에는 너무 불손했다. 그들은 언성을 높이고 심지어는 삿대질까지 해댔다.

남편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잠을 설칠 정도로 전전긍긍했다. 그들의 아버지 나이가 남편과 같다고 했는데, 아들 같은 젊은이로부터 모욕을 당하자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은 모양이다. 그걸 못 견뎠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잊어버리라고 남편을 위로하며 달랬지만 실은 나도 이 문제로 마음고생을 하다 보니 몸무게가 10파운드 이상 빠졌다. 그들은 결국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나가버렸다. 남편은 이들을 혼내줘야 한다고 소송까지도 거론하고 있다.

남편은 그동안 모든 걸 다 내려놓은 줄 알았는데 자존심 하나가 아직 달랑 남아있었다. 그것마저 내려놓으면 삶의 가치가 없나보다.


자존심,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하기에 아직도 내려놓지 못한단 말인가? 그 마지막 짐, 마지막 집착, 그것마저 내려놓고 새털처럼 가볍게 사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최고의 도덕적 경지는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위하는 것이며 집착을 버릴 때 자기중심에서 남을 위하는 단계로 승화하게 된다고 한다. 남편이 마지막 집착인 자존심마저 내려놓고 마음의 평온함을 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용서와 사랑, 희생과 봉사와 같은 덕목으로 채우고 남은 삶을 아름답게 마감했으면 좋겠다.

<배광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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