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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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귀향

2012-10-1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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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수십년을 산 언니가 얼마 전에 영구 귀향을 결심하셨다. 여든 중반에 접어든 노인의 결심치고는 참 대단하다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몇 달 전 하나뿐인 아들이 미국방문을 했는데 그때 그런 얘기가 오갔나 보다.

미국에서는 최저의 생활이 보장 되고 건강 보험도 다 무료이니까 노인들이 귀향을 결심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정이다. 언니는 인생의 마지막 길에서 편안한 삶보다 아들 옆을 택하신 것이다.

언니가 겉으로는 씩씩하게 사신 것 같았지만 정작 늙음에서 오는 외로움에 시달렸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언짢았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아무리 오랜 생활을 타국에서 했다 해도 타향은 타향이고 고향은 고향이기 때문이다.


언니는 처음 미국에 와서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사셨지만 지난 15년 LA에서 사셨다. 그곳에서 첫번째 남편과 51년 만에 다시 만나 5년을 함께 사셨다.

언니는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사신 분이다. 19살 때 황해도에서 시집을 가셨다가 해방과 함께 남편과 생이별을 하고 다시 그 남편을 만나서 함께 살기까지 장장 50년의 세월을 흘려보냈다.

남편과 생이별할 때 언니는 아들을 잉태하고 있었고, 그 시대 젊은 생과부가 겪었을 모든 시련을 이겨낸 분이다. 6.25 전쟁과 50년대, 60년대의 가난을 이겨냈고 나이 50이 다돼서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와서 정착할 때까지 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형제 중에도 특별히 인연이 깊은 형제가 있다. 언니는 그런 분이어서 내게는 언니이며 엄마이며 친구 같이 스스럼없는 분이다. 우리 가족이 몽땅 사기를 당하고 가난이 갑자기 닥쳤을 때, 나는 밥벌이를 위해 미군부대로 갔고 언니는 그때부터 내 두 아들을 기르셨다.

언니는 내게 목의 가시 같은 분이다. 늘 씩씩하게 사시면서도 내게는 늘 슬픔을 주는 분이다.

우리는 종종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맞을 때가 있다. 이번 언니와의 작별도 그렇다. 언제까지나 가까운 곁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실 줄 알았던 언니가 갑자기 아주 한국으로 떠나신다고 했을 때 나는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았다.

지난 수십년 간 혼자 일어나고 혼자 주무시고 혼자 밥을 잡수시는 그런 모든 일상의 생활들이 이젠 무의미 하게 느껴지고 지겨워 져서, 혹은 무서워져서 아들 옆이 그리워졌는지도 모른다.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어미가 칠순을 바라보는 아들과 따뜻한 밥과 국을 나누어 먹고 함께 손잡고 산책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함께 성당에도 나가서 천국을 바라보는 마지막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아름다운 삶이 될 것 같다.

내 가슴으로 찬 가을바람이 지나간다. 이별은 아무리 많이 해도 익숙하지 않다. 더구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별은 더욱 그렇다. 아직은 우리가 살아있고 또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언니의 귀향을 애써 행복한 귀향이라 부르고 싶다.


<김옥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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