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현주 (뉴욕주 교육국 이중언어부 컨설턴트)
한국 매스컴이나 뉴욕을 방문하는 한국 인사들을 통해, 또한 작년 여름 울산에서 열린 2011 세계한민족 여성회의에서 ‘다문화 주의’ 소규모 패널의 사회를 맡은 경험으로 요즘 한국에서도 ‘다문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와 관련해 내가 30년간 경험한 다민족, 다문화주의를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과 다시 한 번 나눠보려 한다.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던 1980년 대학원에서 전문직 준비 과정을 다시 시작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신문에 실린 이중언어 교사 구인 광고를 보게 됐다. 눈을 끄는 것은 교육학 6학점만 있으면 우선 임시 교사 자격증을 준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아이하고 같이 방학을 즐기면서도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사회학 석사로 이수한 학점과 하계 학기에 서둘러 이수한 교육학 6학점으로 가을학기부터 교사 발령을 받았다.
나는 그때까지도 내가 미국의 다민족, 언어를 포함한 다문화 정책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교직에 채용 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흑인(유색 인종)과 백인이 분리돼 살고 흑인이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은 미국 역사와 함께 계속돼 왔으며 이러한 사회의 병을 없애려고 많은 미국인들이 노력했다. 1960년대 민권법(Civil Rights)이 연방 대법원에서 확정된 것이 실제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 놓은 것은 아니지만 우선 법적, 제도적으로 인종차별을 금지하게 된 것이다.
교육분야에서는 ‘Brown vs. Board of Education’라는 판결이 미국 교육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한 흑인학생이 캔자스 토피카 교육청을 상대로 한 소송을 연방대법원이 ‘학생을 분리해 교육시키는 것은 연방법 민권 위배’라는 판결을 한 것이다.
즉, 당시 미국사회에 팽배한 민권의식을 연방대법원에서 인정한 것이다. 동등한 시설만 제공하면 학생들을 백인, 유색인(주로 흑인)으로 분리해 교육시키는 것을 인정한 과거의 법 판결을 번복한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판결을 내리는데 얼마나 많은 교육가, 사회학자, 사회운동자들이 공헌했는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연방인종 통합 교육법을 실행하려고 연방예비군(National Guard)이 동원돼 백인 학교로 전학하여 용감히 통학하는 학생들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당시 텔레비전에도 소개됐다.
’이중 언어 정책’ 역시 교육기회의 평등권을 실천하는 것이며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중국계 학생 라우를 대표한 소송 사건으로 시작됐다. 영어를 모르는 학생에게 영어로 수업하는 것은 평등한 교육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는 판결이 났고 이에 따라 각 주마다 영어 미숙 학생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수업하는 이중 언어 프로그램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중 언어 프로그램이 확장, 번성하는데 큰 역할은 미국대륙에서 자기 언어의 권한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던 스페니시 언어 사용자, 아이티 크리올 사용자, 그리고 중국어 사용자들이 했고, 이중 언어 담당 교육행정가들이 특히 큰 도시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 속에 아시아계 프로그램 담당자가 나를 선택해 뉴욕시 교육청의 한인 이중 언어 교사로 발령받게 됐다. 별 준비 없이 발을 딛게 된 공립학교 교직생활은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내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한국에서 최고 엘리트 교육을 받으면서 이기적이라 할 만큼 자신의 내면 성찰만을 위해 지식을 탐구 하며 자신을 감싸고 격리하며 살던 내가 이곳에 와서는 많은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한국 이민자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게 됐다. 4,000명이나 되는 큰 고등학교에서 거의 200명이나 되는 교직원 중 단 하나의 아시아계 교사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한국인이 중국인 교사보다 먼저 진출한 유일한 학교라고 기억한다. 아직도 수백 명이 참가하는 큰 회의에 단 하나의 동양계 참석자라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이 그때 얻은 습관 덕분인 것 같다.
1970년대와 80년대 뉴욕시 공립학교들은 백인 가정이 인종 통합정책이 발효된 후 뉴욕시를 떠나 교외로 이주함에 따라 백인 학생을 많이 잃고 흑인과 히스패닉계 학생들이 공립학교를 채우고 있었다. 이때 대거 이민 온 한국인들은 도심지 안에서 장사를 시작하거나 봉제공장에 다니면서 자녀들을 도심지 학교에 보냈다. 뉴욕시 학교들은 중국과 한국에서 이민 온 학생들로 질적인 향상을 시작했다. 당시 이민 가정 자녀들은 정말로 뛰어났고 학교의 보석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때의 나는 한국 학생들을 모아서 한국어반을 구성한다는 연방 정부의 시책을 실행하기 위해 배치된 일종의 낙하산 교사였다. 다른 교직원들에게 내 존재는 보석을 빼앗으려는 무단침입자로 보였을 것이다. 또는 반갑지 않은 연방 정부 개입의 끄나풀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싸늘한 무시와 적대감에 별로 개의치 않을 수 있던 것은 한국에서부터 축적한 ‘어려운 환경에 도전해 이기겠다’는 내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혼자서 한국 학생들을 따로 불러 설득시키고 부모의 동의를 받도록 했다. 점점 학생 수가 늘었고 몇 년 후에는 뉴욕시에서 가장 큰 한국어 이중 언어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학교가 됐다. 이어 나의 역할은 교사에서 행정으로 옮겨졌고 아시아계 전체학생을 담당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 이민 학부모들을 위한 교육 강좌도 시작했다. 24시간 야채가게나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학부모를 위해 한국방송도 이용했다. 또한 나와 같은 사람들을 교직에 영입하려고 교사취업 강좌도 여러 번 열어 더욱 더 한인이 교직에 진출하도록 도왔다. 뉴욕시나 뉴욕주 주관 ‘이중 언어 정책’ 회의에 빠짐 없이 참가해 한국 이민 가정이 지닌 문제들을 정책 수립에 반영하도록 노력했다. 시교육청 청문회가 열릴 때는 몇 명 안되는 한인교사들을 총동원해 시선을 끄는 빨간 옷을 입고 맨 앞줄에 자리 잡기도 하면서 뛰어다녔다.
교육학 6학점부터 시작한 나는 연방정부 자금 보조로 교육학으로 두 번째 석사를 받았다. 그리고 교육 행정학에 아시아 여성 신청자가 부족할 당시 뉴욕대학 교육행정학 박사과정을 시작해 거의 10년 만에 학위를 받았다. 그간 행정 및 교과과목을 공부하며 뉴욕시나 뉴욕주 교육국에서 발급하는 교사직, 행정직 면허증, 여러 곳에서 받은 상장과 감사 편지 등으로 나의 방을 도배할 만하다. 나는 다민족주의 언어 정책을 실행하는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했고, 그러한 노력으로 ‘뉴욕 동포 여성 지도자’ 또는 ‘커뮤니티 활동가’라는 이름도 얻게 됐다.
지나간 30년을 돌이켜 본다. 다문화, 다민족주의는 지극히 이상적이고 진보성향을 지닌 사회의 이데올로기다. 소수민들이 소수로 남아있지 않을 때 주류사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해지고 때로는 심각해질 수 있는 위험한 사상이기도하다.
더욱이 미국의 인구변화 추세에 따라 백인이 주도하는 주류 사회의 개념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요즈음 새로이 등장하고 있는 여러 소수 민족 사이에서 진정한 다문화, 다민족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가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인 다문화 미국을 이룩하려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