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린 발명가

2012-08-24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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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전 수필가

폭염이 계속되는 7,8월은 바캉스의 계절인가 한 여름의 바다 파도가 옆으로 길게 손을 잡고 밀려온다. 썰물이라 하얀 포말을 휘날리며 밀려왔다 되돌아가는 힘도 대단해서 파도를 등지고 서 있는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만족한 듯 수평선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나는 비치(beach) 파라솔 그늘에 앉아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먹이 찾아 저공비행하는 갈매기 또는 사람들 가까이서 얌전하게 먹이 던져 주기를 기다리는 갈매기들도 본다. 또는 한 사람, 두 사람 기구에 매달린 줄을 끌고 눈앞을 서행하는 요트(Yacht)도 본다.
애비 에미 손을 잡고 자기 키보다 더 높은 파도타기에 여념이 없는 어린 외손자, 피곤함을 모르는 외손자의 부름에 나 역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왼발 오른 발 번갈아가며 자주 붓는 남편의 발등, 조금이라도 바다 물속에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등 뒤에서 지켜야 하니 몹시 바쁘다.
파도가 밀려와 발 밑 모래를 쓸어가는 바람에 자칫 균형을 잃으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왜 사람들은 수평선을 좋아하는가 하루 종일 보고만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옆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선(線)하나 뿐, 사람들이 말 없는 수평선을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자기와 생각이 같기 때문이 아닐까.
외손자가 해안선에 서 있는 내 곁으로 걸어오더니 손가락을 연필삼아 그림을 그려나간다. 처음 점 하나 콕 찍더니 그것을 기점으로 원을 수없이 연결해 나가고 세모꼴, 마름모꼴, 토끼 귀 등을 그린다.
수학공식 같기도 하고 우주인의 낙서 같기도 하다가 갑자기 숫자가 쏟아져 나온다. 밀리언, 빌리언, 트릴리언 하고 크게 소리 지르더니 이것이 자기가 발명한 것 이란다. 네 살을 넘긴 어린 아이의 두뇌 속에 숫자의 개념이 어느 정도 라는 것을 알고나 있는지. 처음 시작된 곳으로 되돌아가 끝을 마무리하고 부모가 있는 것으로 달려 나가 깔깔거리며 파도타기를 하고 있다.
바다에서 듣는 파도소리는 어린이의 뇌 속 깊숙이 저장되고 발상의 씨앗이 되리라. 노도(怒濤) 풍랑(風浪) 생동감 넘치는 바다의 풍경은 서사시를 들려준다. ‘장 콕도’가 노래했듯이 소라의 귀도 열어주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화지(沙畵紙) 아낌없이 제공해 주며 발상한 것 남김없이 그려보라고 한다.
방으로 돌아가 모래 묻은 것 다 털어 씻어 버리고 저녁 먹으로 나갔다. 의자에 앉으니, 얼마나 피곤한 지 곧 잠이 들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깨었다. 식사 후 산보를 하고 있는데 찬란하게 장식된 보석상 앞에서 발을 멈추더니 에미에게는 보석을, 할머니에게는 진주 목걸이를 사 주겠단다. 돈 벌수 있을 때까지 할머니 살 수 있겠나 했더니 발명가 이니까 사 드릴 수 있단다. 어린이의 능력은 무궁무진하다.
인생을 폭 넓게 살아 나갈 수 있는 초석을 다져 주는 것 또한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 그 나이에 자신 이외 개체를 인식하고 배려할 줄 아는 그 마음이 나를 흐뭇하게 해 준다. 이래저래 노경(老境)에는 별 수 없이 팔불출이 되는 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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