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난한 사람들”

2012-08-1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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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봉사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의 10시간은 길고 무료하다. 그러나 한편 봉사단 일행에겐 가까이서 깊은 생각과 느낌을 오래 나눌 수 있는 대화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지난 달 봉사 후 돌아오던 차안에서 일행들은 가장 인상 깊었던 일로 집단농장의 한 사건을 꼽았다.

우리가 가져간 의류, 생활용품, 신발, 장난감 등을 좌판에 펼쳐놓고 줄서서 기다리는 주민들에게 순서대로 나누어주던 현장이었다.


처음엔 차례차례 진행되었다. 그러나 물건이 3분의 1 정도만이 남았을 때 주민들의 대기 줄이 갑자기 흔들렸다. ‘400명의 군중’이 순식간에 줄서있던 ‘질서’를 파괴하고 거의 폭도의 수준으로 우리를 밀어 제치고 제각기 물건들을 집어 들었다. 한 순간에 좌판은 텅 비어 버렸다.

일행들은 그때 느꼈던 공포와 경악이 이번 일정 중 가장 강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물었다. “어떻게 닥터 최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그처럼 담담히 보고만 있을 수가 있어요? 정말 이해가 안됩니다”

그럴 만 했다. 햇볕에 그을린 시커먼 얼굴, 텁수룩한 수염, 황토 흙바람에 충혈 된 눈…남루한 차림, 험상궂은 모습의 그들이 터진 흙손을 내밀며 밀려왔을 때 놀라고 공포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처음 겪어본 사람들에겐 충격이 강했을 것이다.

난 오랜 기간 그들을 보며 느껴온 나의 생각을 설명했다 :
“좌판에 펼쳐놓은 생활필수품들은 꼭 가지고 싶은 물건들인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만 있다가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고,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것 같고, 단 한 개라도 손에 쥐어야겠다는 욕구가 너무나 강해 그 갈망의 물결이 앞에서 밀려가고 뒤에서 밀려오듯 파도치며 ‘질서’라는 것이 깨어져 버렸을 뿐이지요.

그건 폭력이 내포된 적의도 아니고, 분노의 표출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의 안전을 걱정할 일은 없지요…그보다 갈수록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그들의 무서운 가난과 생활의 각박함 입니다”

우리에겐 그들의 가난을 해결해줄 능력은 없지만 그들의 가난을 이해하는 따뜻한 마음은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중에서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라는 시를 소개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사람을 묻는다…그는 너무도 어렵게 지낸 나머지/그가 사람으로서 인격을 지니기는/이번이 처음이다/그는 집도 땅도 없었고/알파벳도 이불도/구운 고기도 없었으며/그리하여 여기저기로 노상/옮겨다녔고 생활의 결핍으로 죽어갔다/죽어갔다 조금씩…/이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삶이다/미개지를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야채를 거두고 땅에 물을 주고/유황을 갈아 가루로 만들고 땔나무를 운반했다면/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사람이 구두가 없었다면/ 아 비참하다, 이 힘줄과 근육이/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사는 동안 정의를/ 누린 적이 없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넘어뜨리며, 그런데도/노동을 계속했고 이제 관에 든 그를/우리어깨로 들어 올리고 있다면/이제 우리는 적어도 안다 그가 얼마나 갖지 못했는지를/그가 지상에 살 때 우리가 그를 돕지 않았다는 것을/이제 우리는 안다 우리가 그에게 주지 않았던 모든 걸/우리가 짊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때가 늦었음을/그는 우리에게 무게를 달고, 우리는 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 일행 중 한사람이 시의 전문을 낭독했다. 돌아오는 길은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 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 가슴 속에 와 닿을 수 있다면 그래서 공포스러웠던 가난의 행위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드릴 수 있게 된다면 이번 일정은 일행 모두에게 의료봉사 자체보다 더 깊은 가치와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최청원
내과의사
바하힐링미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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