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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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덕수궁

2012-07-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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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서울에 머무는 동안 덕수궁에 들어가 보았다. 미국에 이민 온 후 십여 차례 한국을 방문했지만 그곳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 적어도 36년 이상 세월이 흐른 셈이다. 바쁜 체류일정 속에서도 덕수궁에 간 것은 마침 투숙한 호텔이 근처에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나에게 젊은 날의 추억을 주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덕수궁의 겉모양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출입구로 쓰이는 대한문을 끼고 좌우로 둘러싸인 돌담길도 그랬고 안으로 들어가며 곧 건너는 금천교와 비포장도로로 만들어진 산책로도 여전하였다. 가운데 서있는 중화전, 그 오른쪽의 함녕전, 덕흥전 그리고 왼편의 석조전과 분수대 등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체 오랜만에 찾아온 방문객을 흐뭇하게 해주었다.

덕수궁 매표소 앞의 넓지 않은 공간은 마치 도떼기시장처럼 소란스럽고 지저분하였다. 입장객이 아니라 하고많은 날 점령하고 있다는 무슨 노조원들의 데모 때문이었다. 오가는 사람과 관광명소를 찾은 외국인들의 통행도 불편했지만 시위자들의 저급한 태도와 언행은 정말 꼴사나웠다.


시청 쪽 돌담길 양편은 이런저런 장사꾼들과 시위진압 경찰버스가 진을 치고 있어서 고즈넉해야 할 고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 속을 뚫고 매표소에 가서 입장료를 물으니 매표 아가씨가 ‘연세 드신 분은 무료’라고 말한다. 역시 한국은 미덕이 남아있구나 싶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는데 어느 틈에 내 지갑의 운전면허증을 보았는지 “한국분이 아니시군요? 천원 내셔야 해요” 하는 것이다.

무엇이라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외국인에게도 입장을 무료로 해주면 얼마나 한국의 경로사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좋은 인상을 심어줄 것인가? 행정당국의 근시안적인 정책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덕수궁의 관광객은 거의가 외국 사람인데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그들은 중화전 앞뜰의 좌우에 세워진 품계석과 건물 내부의 용좌에 관심이 많은지 주로 그 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석조전 앞에는 정원과 커다란 청동제 분수가 있고 가까이에 벤치가 놓여있어 좋은 쉼터가 되고 있으나 사람들은 구경이 주목적인 탓인지 별로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예전에는 그 일대에서 계절 따라 각종 전시회가 열렸고 특히 가을철 국화전시회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만큼 장관이었다. 은은한 향기 속에서 순백의 아름다움과 고결한 자태를 감상하노라면 비록 황족의 애환과 영욕이 서린 곳이지만 우리 민족의 끈질긴 얼과 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전쟁 후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모두가 나라를 걱정하고 서로 위하는 마음이 따뜻했었다. 옛 생각에 미치자 오늘의 현실이 더욱 답답하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매일 같이 일삼는 시위대와 한갓 관광꺼리로 전락한 덕수궁은 더 이상 젊은 날 웅지를 다듬고 사랑을 키우던 곳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렀는가, 세상이 변하였는가. 나는 다시는 찾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석양에 물든 하늘을 뒤로한 채 대한문을 쓸쓸히 빠져나왔다.


조만연 /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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